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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체근대(2009), 지그문트 바우만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근대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은 현대 사회를 액체근대liquid modernity'로 정의한다. 액체의 가벼움‘, ’이동성‘, ’무일관성등이 오늘날의 속성을 잘 나타내준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전 시대인 근대는 이와 대비되는 '고체'로서, 원자들을 분리시키려는 힘에 대한 저항력을 지닌 결합성으로 인해 안정적일 수 있었다.

근대 역사에서 여러모로 새로운 단계인 오늘날, 액체근대는 일정한 형태를 오래 유지하는 일이 없이 지속적으로 변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그리고 자주 그렇게 된다)(8).”

 

근대modernity는 전근대 시대 이후에 새롭게 도래하여 현대 이전까지 지속된 역사의 특정 시기를 일컫는 용어이기도 하지만 전근대를 무너뜨리고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강력한 변화의 과정으로 많은 학자들이 보기도 한다.

이를 바우만은 액화로 표현하며, 근대는 시작부터 해방을 위해 전근대 시대의 견고한 것들을 녹이는 과정이었고, 가장 먼저 녹여야 될 견고한 것, 세속화되어야 할 신성은 전통에 대한 충성심과 관습적 권리, 의무였다고 설명한다.

뒤이어 신성한 것들을 세속화하기롤 요청하게 된 바, 과거를 부정하고 폐위시키되 무엇보다도 먼저 전통, 즉 현재에 존재하는 과거의 침전물이나 잔여물들을 그렇게 해야 했다. 따라서 견고한 것들이 액화에 맞서 저항할 수 있도록 하는 제반 신념과 충성심으로 지은 방어용 갑옷을 부숴버릴 것이 요구되었다(10).”

 

 

액체근대와 칠포세대

 

칠포세대는 연애, 결혼, 출산, 내집마련, 인간관계에 꿈과 희망까지 포기한 한국의 2030세대를 일컫는 말이다. 일곱 가지가 있지만 크게 경제적 문제와 관계 문제, 미래에 대한 기대 상실의 문제 세 가지를 풀어놓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애초에 연애부터가 비정규직과 실업상태를 오가며 좁은 고시원이나 반지하에서 간신히 생계 유지 정도를 하고 있는 수많은 젊은이들에게는 언감생심 바라기 힘든 일일테고 인간관계도 사치이긴 매한가지다. 연애를 못하면 결혼과 출산이라는 후속 과정이 따르지 못하고, 연애는 하더라도 경제적 부담으로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거나 결혼까지는 하더라도 자녀를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내집마련은 웬만한 정규직 직업을 가졌더라도 쉽지 않다. 평균 소득(2인 이상 가구의 월평균 가처분소득 3562900, 201512월 기준)을 버는 가구가 한 푼도 쓰지 않고 13년을 모아야 서울에 아파트 한 채를 장만할 수 있다고 하니, 기본 생활비에 자녀양육비와 웬만한 청년이면 없기 힘든 부채금 상환까지 지출로 빠져나가는 것을 고려하면 실제 걸리는 기간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한 조사에 따르면 취직 후 39년이 걸리며 68.5세에 가능하다고 할 정도다.

이러한 현실이 2030 청년들이 빠르면 영어 유치원, 일반적이라면 초등학교부터 대입까지 각종 학원을 전전하며, 이후엔 학점과 스펙 경쟁과 각종 고시 등을 위해 하루종일 책상 앞을 지키며 공부하고, 수십 개의 입사 원서를 쓰고(그만큼 탈락의 고배에 잠기고) 매일의 야근과 주말 근무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의 평생 노오오오력함에도 맞닥뜨리게 된 결과이며, 심지어 앞으로 한국경제는 세계경제와 더불어 악화일로일 거라는 전문가들의 비관적 전망이 매일같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이들이 꿈과 희망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그게 더 신기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칠포세대에 대한 이러한 오늘날의 주류 경제론적 설명이 틀린 데 하나 없는 옳은 말인 것은 분명하지만 경제 문제 외에 관계 문제와 미래 기대 상실 문제에도 모두 경제적인 해석만이 주어지고 있는 제한된 설명이라는 점은 오늘날 거의 주목받지 못하는 아주 중요한 사실이다.

바우만은 이 부족한 지점을 채워준다. 일반적으로 부족한 지점이라 하면 넓게 채워진 부분에서 약간의 공백이 있는 그림을 떠올리게 하지만 이 경우에는 약간만 채워지고 대부분이 공백으로 남아있는 상황이다.

사실 경제론적 해석만이 존재하는 오늘날의 문제 접근 방식 자체가 바우만이 보는 액체 근대 문제의 중추라 할 수 있다.


   

1) 액화 결과 생성된 새로운 틀: 경제 언어로 규정되는 계급 구조 

 

이전의 세계를 다 녹여버리고 액체 상태로 부유하는 액체 근대의 새로운 견고한 틀은 칼 마르크스의 경제의 지배’, 막스 베버의 도구적 이성의 지배가 현실화된 곳이다.

실상 어떤 주형틀도 다른 틀로 대체되지 않고서는 파괴될 수 없었다. 사람들은 낡은 새장에서 벗어났지만 완제품으로 제공된 새로운 질서(15)” 안에서 살게 되었다.

전통적인 정치, 도덕, 문화적인 틀에 묶여 있던 경제가 점진적으로 해방되고 다른 영역들에 지배력을 확대하며 몸을 키우다 결국 그 모든 것을 흡수하며 경제적 언어로 규정되는 하나의 새로운 질서가 탄생한 것이다.

견고한 것들을 녹이는 것은 무엇보다도 결과에 대한 합리적 계산-막스 베버가 표현한 대로 가족과 집안에서의 의무, 빽빽한 도덕적 의무사항들이라는 족쇄로부터 기업 정신을 해방시키는 것, 그리고 토마스 칼라일의 생각대로 인간 상호관계와 책임감 저변에 깔린 수많은 유대 중에서 현금의 축만을 남겨 놓는 것이 그러하다-을 가로막는 부적절한 의무사항들을 벗어던짐을 의미했다(11),”

 

전근대의 신분 구조가 녹아 사라진 공백을 채운 것은 이전 질서만큼이나 견고하며 비합리적인 경제의 언어로 규정되는 계급구조다.

일단 완강한 신분 구조가 무너지자 근대 초기의 남녀들 앞에 놓인 각자의 정체성 부여과제란 결국, 계급적 기준에서 추락하거나 일탈하지 않고 새롭게 출현한 계급 사회 유형과 행동 모델을 적극적으로 수행하고, 모방하고, 그 패턴을 따르고 변용하여 자신의 부류에 맞는 (자신의 이웃과 격을 맞추는) 삶을 살아야 하는 도전이었다(54).”

상속받은 속성의 신분과 달리 계급은 성취의 척도를 요구했고,자유롭고사적인 현대의 개인들은 자신의 위치를 당시 사회가 합당한 것으로 정의한 양식에 맞추도록 재정립하기 위해 평생동안 노력을 기울일 과제를 타고난다. 실패할 경우 그 비난과 책임 역시 자유로운 개인이 오롯이 져야함은 두말할 나위 없다.


설상가상으로 액체 근대 시대의 규약들과 양식은 시시각각 바뀐다.선결조건으로 추구되는 종류의 토대들은 무너져내리기 쉽고 재구축작업이 완수되기 전에 종종 사라지기도 한다. 그 대신 의자 빼앗기 놀이에 사용되는 다양한 크기와 모양을 지닌, 개수와 위치가 변화하는 의자들이 있다(56).”

개인들은 조금의 휴식도 없이 평생 노오오오력만 해도 불안감과 조바심을 떨쳐낼 수 없다.



2) 인간 유대관계의 액화 및 해체


액화와 도구적 합리성의 지배는 인간의 유대관계에도 미치며 사회적 유대는 물론 동반자적 유대도 해체되고 있다.

게다가 견고한 것들을 녹이는 일은 전반적 사회관계의 복잡한 그물망을 느슨하게 만들어, 이제 그 그물망은 헐벗고 보호받지 못하고 비무장인 채로 노출되며, 기업 정신으로 충만한 행동 규칙들과 기업 형태의 합리성에 대한 기준에 맞서 효과적으로 경쟁하기는커녕, 저항할 수 없는 상태로 방치되었다(11).”

구조적 실업의 세계에서 노동 환경은 단기적이고 불안정한 일회용품에 불과하기에 직장이나 동료들과의 관계에 애정과 헌신을 기울이는 일은 무의미하고, 좌절만을 동반할 어리석은 짓이 된다.

액체 근대에서 부유하는 현대인들은 서로를 스쳐갈 뿐이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와 같은 헌신은 그 정의와 의도와 실제적 여파로 볼 때 만족이 지속될 때까지와 같은 일시적이고 덧없는 계약, 어떤 비용을 치르고서라도 그 관계를 지켜내려고 노력하기보다는, 파트너 중 하나가 다른 기회나 더 나은 가치를 발견하면 얼마든지 몸을 빼내는 계약(259)”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가족, 연인, 친구 등 사랑하고 의지하던 대상의 상실은 일상화되었다. 그래서 상실감과 상처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아예 깊이 있는 관계를 피하고 고립을 택하는 사람도 그만큼 많아졌다.

개인들을 긴밀히 연결하고 서로를 지탱해주던 관계들이 녹아 사라진 액체 근대에서 크나큰 불행과 고뇌, 인간적 고통을 대량생산하고, 사랑도 전망도 없는 실패한 인생들이 그만큼 더 늘어나게 되(144)”었다.

   


3) 공공성의 액화 및 대안의 소실

 

장기적으로 상호 의존하는 시대는 막을 내리고 이제 어차피 일시적일 수밖에 없게 된 일회용 관계의 시대로 넘어온 현대에서 공공이라는 개념은 더 공허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의 불확실성은 강력한 개인화의 힘이 되고 있다. 통합하기보단 분리하며, 다음날 눈을 떠보면 어떤 식으로 분리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공공의 이해라는 개념은 점점 더 불명확해지고 실용적 가치를 송두리째 잃고 있다(238).”


사회적 위험과 모순은 구조적으로 끊임없이 생겨나는데 개인들의 문제로만 치부된다.

게다가 자유를 추구하는 개인들은 대의명분, 공공의선, 혹은 정의로운 사회에 대해 미온적이거나 경계심을 갖기에 개인의 문제들이 응결돼 공동의 대의명분으로 구축되거나 공동 행동으로 나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액체 근대가 가진 도구적 합리성의 헤게모니는 비경제적 행동에서 나오는 도전들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새 질서를 변화시키거나 개혁할 힘이 있는 정치적 도덕적 지렛대는 대부분 파괴되거나 그 일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짧거나 약하거나 부적합한 것이 되어버렸다(12).”


사회적 규범들이 쇠퇴함에 따라 생겨나는 것은 사랑과 도움을 갈구하는 헐벗고, 두려움에 질린, 공격적인 자아이다. 자아 그 자체 그리고 애정어린 사회성을 찾는 속에서 이 자아는 자기 안의 정글에서 길을 쉽게 잃게 된다. /그녀의 자아라는 안개 주변을 더듬고 있는 자는 더 이상 이러한 고립, ‘자아 안에 홀로 갇힘이 하나의 대중적 형벌임을 알아차릴 능력이 없다(61).”

울리히 벡을 인용한 위 서술은 액체근대의 망망대해에서 방향을 잃고 기약 없이 홀로 표류하며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남은 자원들을 끌어안고 두려움, 절망 속에 고통하는 원자화된 현대인들에 대한 탁월한 묘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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