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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주의 개념(https://en.wikipedia.org/wiki/Socialism)
사회주의란 무엇일까. 사회적 공공 소유의 틀과 민주적 공공의사 결정에 의한 통제로서, 사회적 체제와 경제적 결정권이 조율되는 정치 이데올로기와 이념 그리고 이의 설립을 목표로 하는 운동, 움직임을 말한다. 사회적 공공 소유권이란 공적이며, 협력적이며,집합되어 있는 소유권의 형태로 (혹은 이의 결합으로) 언급될 수 있다. 사회주의는 수많은 정의에 대한 많은 다양성과, 하나로 개념화할 수 없는, 압축된 개념이며, 사회적 통제권, 소유권은 다양한 형태에 의해 공유되고 보편적으로 나누어진다. 사회주의는 시장의 영역을 포함하는 것, 시장의 영역을 포함하지 않는 두 가지 영역으로 일반적으로 구분 가능하다.
 
 
동아시아 근대화와 자본주의 형성 및 전개

(Cf. 동아시아 근대화와 자본주의 형성 및 전개 : 대안적 이론에 의한 해석_김경동(서울대 명예교수)_아시아 리뷰, 2016

근대화에 있어서의 역사적 의의는 다음과 같다. 변화의 내용보다는 과정의 특성을 규명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그 결과의 과정에서 사회문화적 현상을 일컬어 근대성 modernity라 하는데, 근대의 시기 구분은 서방 역사학계가 자신의 역사 시기를 고대 ancient 중세 medieval 그리고 근대 혹은 근세 modern으로 구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서의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근대화란 인류 문명사에서의 근대란 시기를 여는 시점에서의 서부 유럽에서 시발된, 광범위한 사회, 문화적 변동을 말하는데, 이것은 서방이 지목한 근대에서의 16세기 초를 전후하여 유럽에서 일어난 각 분야의 문명론적 변화가 거의 동시적으로 발생한 시기에서의 르네상스, 콘스탄티노플 함락, 신세계발전과 자연과학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과 근대 자본주의를 포함하는 사회 각 분야의 혁명적 성질의 변동을 포괄한다. , 시로(Chirot 1994:5)가 지적한 것과 마찬가지로 "근대의 세계란 서부 유럽 일부 지역에서 발명되었고 근대성은 그로부터 전 세계로 전파해나간 것이다." 근대화 변화의 주요 특성으로서 이의 인용문에서 주목할 단어는 전파다. 근대화 과정이 중요할 때의 과정의 가장 두드러진 것이 바로 전파이며, 이로써 자본주의는 팽창주의적인 성격-성질을 띤다. 자본주의 목표 자체가 이윤 극대화이므로 시장이 필요하고 이로써 근대화를 촉발한 서유럽의 나라들의 규모가 작아진 것이다. 따라서 다른 세상으로 널리 확장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 저들이 발명한 근대화 소산으로서의 항해, 기업 활동 제도화, 전쟁 수행 등을 위한 자본과 기술이 커진 것이고 이의 해외 탐험이 이루어졌다. 19세기에 이르면 제국주의적 팽창주의가 발톱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이런 과정의 근대화는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팽창 과정은 일종의 국제적 문화접변 international accumulation을 초래하는데, 이의 문화가 접촉에 의해 변화되는 것이 과정이다. 이질적 문화를 접하는 사회는 부득불 선택적 적응 selective adaptation을 한다. 결과적으로 사회마다 제 나름 외래문화를 수용해 토착화되고 그 결과 곧 사회의 특유의 대안적 근대성 alternative modernity가 커진다. 근대화란 ) 국제적 문화접변 2) 적응적 변동에 대한 외래문화의 선택적 채용 selevtive adoption을 토착화하여, 대안적 근대성을 창출해나간다.
 

국제적 문화접변
문화접변은 안방에 의한 문화를 초래하는 것인데, 전 지구적 근대화의 문화접변은 일방적으로 기울어진 변화의 과정에 변질된다. 경제, 과학기술, 군사 등 각 부문의 세력 비대칭을 통한 비서방 후발국가가 서방발 근대국가화의 일방적 수용하는 위치에서의 근대화가 경험되었다. 이런 일방성으로 인해 서방 초기 근대화론자들의 근대화,서구화, 미국 화가 규정된다(Lvevy,1944 :Eisentadt 1964) 실제 근대화는 역사의 일방적 수렴이 아닌 다양성 산출과 다중 근대성(multiple modernities)를 가져와 대안적 근대성을 인식한다.
 
선택적 적응과 선택성의 원리
이런 대안적 근대성이 성립하는 과정에서 두 가지 선택성의 원리(Principles of selectivity)가 작용한다. 1) 정치적 선택성과 2) 문화적 선택성이다. 정치적 선택성은 외래문화를 접하면 이에 대응하는 자세와 전략을 결정하는데 작용하고 그러한 정치적 결정의 배경은 문화적 선택성이 개입한다는 원리다. 정치적 선택은 그 사회 각계각층의 사회적 세력들이 정치적 결정과정에 참여할 개연성을 좌우하는 구조적 유연성이 개입한다. 이런 정치적 결정의 저변에서 작동하는 문화적 선택성은 문화의 유연성, 개방성, 준비성, 친화성 및 양립 가능성 등에 대한 상이한 정치적 선택의 결과를 가져온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선택적 적응은 그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계층, 부문, 집단과 조직체로서 다른 이념, 신념, 가치관, 이해 관심 등을 둘러싸고 상호작용하여 가운데 상이한 세력과 특권과 영향력을 발휘하고자 갈등하는 결과로 근대화를 토착화하여 대안적 근대성이 생성된다. 동아시아 자본주의 생선과 전개 과정을 위한 근대화의 과정의 일환으로 이루어지는 모습을 분석하는 작업에서 이론적 합의를 되새길 기회가 있을 것이다.
 

동아시아의 제1기 근대화와 자본주의의 생성

초기 대응의 특징
동아시아 근대화의 시발 시점을 언제로 규정할지에 관한 규정과 견해차가 있을 수 있는데, 여기에 동아시아 3국 제국주의 국가와 개항 무역을 위한 조약을 공식적으로 체결하던 19세기로 보는 것이 근대 화론에 가장 합당하다고 할 수 있다. 지난 16세기 근대화를 개시한 서방세계가 동아시아와 외교무역 관계를 맺기 위한 움직임을 보이는데, 본격적 접촉에 의한 국제적 문화접변이 일어난 시기가 19세기다. 강력한 무력과 경제력을 과시하며 접근한 서방의 세력에 대한 동아시아 3국의 대응에는 한두 가지 묘한 공통점이 있었다. 첫째는 쇄국이고 둘째는 최초의 적응적 변동의 시도다.

주지사 하디시피 동아시아 3국은 당시만 해도 중국 중화사상의 영향 아래 외교나 무역을 역내에서만 허용하고 지역 외의 다른 나라와는 접촉을 금기시했다. 중국은 이념적 유고, 성리학의 세계관에 기초한 도덕적으로 우수한 중국 외에 해외는 물론 주변 나라와 이민족을 모두 야만으로 간주했다. 물론 조선과 왜국도 포함하는데 조선은 그나마 성리학의 정통성에 충실한 군자 나라로서 소중화라는 영예를 입고 위정척사의 자세를 고수한다. 일본은 중국이 야만이라 취급하는데 스스로는 신의 자손인 천황이 다스리는 나라로서 중국보다 우월하단 민족주의적 사상에 심취해있었다. 이런 이유로 3국은 공히 서방에 대한 쇄국을 고수하려 했다. 국제적 현실은 국수주의를 비웃기라도 하듯, 중국은 전쟁에서 패배하며 문호를 개방한다. 일본은 내부 세력교체에 의한 스스로의 객방을 선택하고 조선은 복합적 국제관계 속에서 불가항력적으로 개혁에 동참하게 된다. 물론 이 과정을 통해 세 나라 모두 공히 선택적 적응을 시도한다. 공통성도 있다. 중국은 주에 처용, 인본은 화혼 양재,조선은 동도서기가 그것이다. 모두가 물질적으로 서방 과학기술을 도입하되 정신적으로 동방의 도를 지킨다는 적응적 자세인 것이다. 여기에 세 나라의 근대화의 자본주의 전개 과정 도정이 달라졌다.
 
중국 자본주의 도래
중국의 초기 근대화는 자본주의가 생성한 배경에는 국가, 시장 간의 연계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강력하고 자율적 국가작용 또한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유럽에서 전 지구적 차원의 근대화를 시작할 때 중국은 민간부문 경제의 기업인들보다 더 철저하게 상업화한 경제를 지속적으로 활발히 운영했다. 그중 일부는 상당한 이윤을 취득한다. 중국인들은 태생적으로 장사를 잘해서, 기회를 막론하고 돈벌이를 좋아했다. 초기 근대화 시기부터 중국 사회는 물질적 자원의 희소성 문제가 컸고 사회이동도 활발했고 시장 통합도 잘 된 상황에서 사유재산 보호도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다름 아닌 국가 부문,즉 정치 영역에 대한 유일한 아킬레스건으로서의 약점이 있었는데, 청나라 정치적 중심으로서의 국가는 과도한 권력을 집중적으로 장악하고 있었고 국가 외의 어떤 행위자도 집단도 독립적으로 행동할 위치가 아니었고 지방 군벌들은 자치역량을 발휘할 경험이나 군사적 능력을 갖추지 못 했다. 이런 상황에서 늘어나는 인구를 흡수할 산업이나 상업의 개선은 결여된 채 중앙정부의 재정을 지탱할 수입원은 줄어들어 관료와 군부 부패가 만연한 가운데 농민을 위시한 대중 불만 또는 걷잡을 수 없이 높아가고 전국적으로 반란 혁명의 바람이 끊임없이 불었다 .개혁을 추진할 기력도 없고 개혁을 실시한다 해도 각종 정치세력의 전향으로 번번이 실패로 끝났다. 19세기 서방 제국주의 국가는 물론 일찍이 근대화에 성공한 신생 일본제국마저 막강한 군사력으로 위협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국가는 이런 대내, 대외 외적 위협에 적응된다.
 
북한식 사회주의
(Cf. 북한과 베트남의 개혁-개방 비교 연구_정상인(한림대 사회학과)_통일 문제 연구 95년 하반기로(통권 제24호)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란 이름의 사회주의 국가가 북한에 공식적으로 공표된 게 1948 9월이었다. 그것은 출범부터 한 달 전에 수립된 남한의 친미, 반공 정부와의 적대적 분단국가였다. 한반도의 두 국가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6년 이미 그 원형이 태동했다. 베트남과 마찬가지로 한국 또한 20세기 전반에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전락했고 상대는 일본이었다. 한국의 민족해방운동은 베트남에 비해, 통합성과 강도에 있어서 비효율적이었는데, 남한의 독립운동은 이념적으로 분파적이고, 일본의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특히, 일본 항복 후의 미국과 소련은 한국을 분할 점령했고 한반도에 찾아온 냉전은 인도차이나반도보다 다소 빨랐다. 북한 정권의 기원은 일제 식민지 중반기의 김일성이 만주에서 항일 게릴라 활동을 한 것에 의함이었다. 1925년 창당된 조선노동당은 민족해방운동에 바탕을 두 사회주의 혁명의 내생적 조건과, 소련 세계 공산화 전략에 대한 외부적 이식을 혼합한 공산당으로서 김일성 권력의 모태였다. 1940년대 말 북한은 토지개혁을 비롯한 반제, 탈 식민지 혁명을 시도했다. 해방 직후인 1940년대 말, 북한은 사회혁명에 이어 본격적 사회주의 혁명에 착수한다. 생산양식의 사회주의적 개조를 통한 생산수단의 집단화, 국유화 원칙을 통해 농촌에서의 농업협동 화가 추진되고 도시에서는 소상품 생산양식과 자본주의 상공업이 사회주의적인 것이 된다. 19548 8월까지 북한에서의 생산양식은 사회주의에 대한 전일적 지배로서 확 납되었다. 사회주의 혁명을 단기적,성공적으로 완수한 북한은, 사회주의 경제발전을 위한 혁명을 시도했다.

기본 노선은 중공업 우선 발전, 경공업과 농업의 동시 발전이란 전형적 스탈린 모델로서, 3개년 인민 경제계획(1954-56), 1 5개년 계획(1957-1961)이 각각 실시되고 1960년대 초 북한은 사회주의 공업/농업국가가 되었다. 인민 경제계획 기간 동안 북한의 공업 총생산량은 연간 42%였고 농업 생산량 역시 전쟁 전 수준을 능가하며 제1 5개년 계획 동안 공업 총생산량 연평균 성장률이 36%에 달하며, 국내 총 생산 가운데 공업 부문이 차지하는 비율은 0%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주체 방식에 의한 주체 경제는 가능한 한 국내 자원의 동원과 내수시장 확대에 기초하여 대외 의존을 배격하고 자급 경제 내지 주력 생산을 통한 보다 자주적이고 일국적인 측면에서의 경제체제다.
 1950년 북한은 사회주의 체제의 건설을 한반도 전역으로 확대하려는 시도로서 한국전쟁을 벌였다. 한국전쟁은 곧 냉전에 의한 첫 국제전이었다. 김일성의 야망은 미국에 의해 좌절되고 1953년 이후 한반도에서의 분단은 더욱 고착화된다. 김일성은 한국전쟁을 통해 남한이 지원하던 친미, 반공국가를 붕괴하는데 실패하고 전쟁으로 인한 엄청난 사회경제적 피해를 입는데, 정치적으로 볼 대 권력 공고화를 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했다. 김일성은 전후 정적 숙청을 했고 개인숭배를 강화했다.   중요한 건 1950년대 중반부터 나타난 주체사상에서의 북한 체제 정치 경제 이데올로기인데, 주체사상은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한국 민족주의의 결합으로 신성불가침 이데올로기가 된다. 주체사상은 1인 지배 제하에서의 유일지배체제를 형성했고 비 실용주의 비탄력적인 방법을 통한 통치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했다. 유물론의 사관으로부터 북한 사회주의 체제가 내용적으로는 사상과 이념 중심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1960년대 들어 북한 경제 성장 속도는 하강 국면에 접어든다.무엇보다 북한을 통한 지정학적 환경이 불리하게 전개되었으며, 북한이 군사비 투자를 증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960년대 초 남한의 반공을 국시로 하는 군사정권이 출범하고 베트남전쟁이 격화되어 동북아 간 긴장 수준이 높아지고 한일 국교정상화가 모색되던 시점이 커졌다. 북한은 국방 건설과 경제건설을 병진하였고 1950년대 성과를 바탕으로 추진되었던 1960년대의 제1 7개년 계획(1961-67) 3년 동안 연장해 10년 만에 겨우 목표 달성이 가능했다. 1970년대 초, 북한은 '사회주의 공업국가'가 되었다고 선언했다. 북한은 청산리 방법, 대안의 사업체계와 같은 약간의 개혁을 통한 여전히 정치적 대중 동원 캠페인 방식을 통한 경제발전의 견인차가 되었다. 1 7개년 계획기간 중 공업생산력은 연평균 13%를 유지하나, 전반적으로 북한 경제 성장세는 1960년대 이르러 둔화되고 있음이 분명했다. 북한의 6개년 계획(1971~76)은 농업부문과 소비재 생산에 대한 국가적 관심이 상대적으로 높아져, 1960년대의 제1 7개년 계획은 3년을 연장해 10여 년 만에 겨우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1970년대 초 북한은 사회주의 공업국가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이 기간 동안 북한은 청산리 방법, 대안 사업체계와 같이 약간의 개혁을 시도하며 정치적 대중 동원 캠페인 방식에 의한 경제발전을 견인했다. 1 7개년 계획 기간 중 공업생산력과 성장이 연평균 13%를 유지하나, 전반적으로 북한 경제 성장세는 1960년대 말 이르러 둔화되고 있었다 1970년대 초반, 북한은 대외개방을 시도했다. 1980년대 북한은 그것을 통한 필적할만한 내부적 정책 전환을 통하여 1984년 북한은 획기적인 전환의 해였다. 사실상 1980년대 점증하는 경제적 침체 상황을 위한 북한 지도부의 인식 변화가 나타났다. 1979년 신년사에서 김일성은 처음 대외무역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수출품 생산 증대를 강조한다 또한 1980년대 열린 조성 노동당 제5차 당대회에서 제2 7개년 계획의 완수를 목표로 하는 소위 10대 전망 목표를 발표하며 1980년대 말까지 수출액의 증가를 목표 경제성장률 3.1배를 상회하는데 4.2배로 설정한다. 이어 김정일은 1982 3월 발표한 "주체사상에 대하여"란 논문을 통해 "자력 갱생의 원칙에 의한 자립적 민족경제를 달성한다는 것에 대한, 문을 닫아 매고 경제를 건설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대외 경제관계의 확대가 주체사상에 반하지 않고 오히려 주체사상에 의해 대외개방이 정당화된다는 길을 열었다.

합영법으로 대표되는 대외 경제관계의 수정은 1984 1 26-28일 제7 3차 최고인민회의에서 "남남 협력과 대외무역을 강화하고 무역활동을 더욱 발전시킬 데 대하여"란 결의를 바탕에 둔다. 이를 받아들여, 9 8일 합영법과 시행세칙이 발표됐고 1985년에 외국인 소득세법,합영회사 소득세법 등 세칙 등이 있다라 시행된다. 1984 10월 윤기복 중앙인민위원회 경제정책 위원장은 합영법의 제정 취지에 대한 우리나라의 이미 자립적 민족경제를 확실히 구축하였으며,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나라, 일본,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나라에 회사, 기업소, 개인을 합영의 대상으로 하여 그들에 대한 특별한 제한이나 차별이 없으며, 우리나라에 대한 적대시 정책을 추진하고 나라의 당국자와 개별적 회사, 기업 소, 개인을 구별한다.

대외 경제관계를 통해 북한은 일련의 개혁 작업을 추진했다. 1984년 신년사를 통해 김일성은 인민생활의 획기적 향상을 강조했고 2 16일 김정일은 인민생활을 위한 연설을 하였다. 이후 김정일은 인민생활 향상을 통한 식량문제의 해결을 가장 우선시했고, 이를 통해 김정일은 '식의 주' 쪽이 훨씬 더 현실적이라 했다. 농업부문에서 또한 북한은 생필품 생산을 위한 경공업 발전에 대한 정책적 관심을 표현한다. 1984 8 3일 김정일은 경공업 제품 전시장 시찰과 인민생활의 독려를 함께하는, 8.3 인민소비 생산 운동을 발표한다. 1990년 대 신년 사에서 김일성은 경공업 혁명을 강조했다.

이처럼 1984년 이후 경제정책에서의 기구 개편,담당 관료들의 인사교체가 눈에 띄게 늘었다. 기구 개혁 관련하여, 1985 6월 각 도, 시, 군 당 위원회 책임비서가 해당의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겸하며 지역 경제지도 위원회를 행정 경제지도 위원회로 개편한다. 당시 지방 권력구조가 당 위언회,인민위원회, 경제지도 위원회란 세 축을 중심으로 구성된다면 이후 실질적 당 위원회와 행정 경제지도 위원회의 두 중심으로 바뀐다.  이는 당이 기본적 결정권을 장악하며 당의 행정대행 주의가 비판되고 정책집행 관련한 당이 필요 이상으로 행정기관에 개입하지 않고 수정한 것을 의미한다. 지방행정기관 재편만이 아닌 기업에 대한 제도적 변경 또한 이 무렵 실시되는데 1984년 신년사를 통해 김일성은 경제 관련 개선을 강조하고 3월 김정일은 독립채산제를 현실에 맞게 경제적 자극을 이용하는 방침으로 바꿀 것을 지시한다. 2월 국영 기업소득,독립채산제에 관한 규정이 재정되어 기업자 주권의 제한적 권리를 확대하여 법적으로 뒷받침한다. 이어 7월 연합 기업소를 합리적으로 조직 운영하는 조치가 발표되는데 그 골격을 보면 연합기업소는

1) 母體 공장을 중심으로 이러한 지역 내의 생산적, 연계가 밀접한 부문의 공장, 기업소를 망라해 조직된 것 2) 일정 지역 내의 동일 부문의 공장과 하청 기업소를 조직한 것 3) 전국적 범위의 부문 혹은 서로 다른 부문의 연관된 공장과 기업소를 총체적으로 망라해 조직된 것이다. 이를 관리 및 운영하기 위한 북한은 국가기관의 권한을 통해 연합기업소에 부분적으로 이양하고 기업소들의 책임성, 창의력 발휘를 위한 국자 지도를 간소화시켰다. 아울러 중앙 병기관 관련 재편 작업도 추진되는데 그 내용은 기존 기관들 통합 분할과 새로운 기관 설치 두 가지다. 우선 전자의 경우 경제 관련 정부 내 유사 부처 간의 통합이 중심이고, 후자의 경우 984 1월 제7 3차 최고 인민위원회에서 중앙인민위원회 경제정책 위원회가 신설되고 정무원 도시 경영부 ,지방공업부 ,합영공업부 등과 같은 대외 경제위원회가 새로 조직된다. 이의 경우 경제조직의 개편 관련해 담당 경제 관련하여, 경제관료가 대폭 교체되었다. 이후 김일성, 김정일 세대 사이의 1.5세에 속하는 테크노크라트들은 북한 경제관료의 인사개편성의 특징을 통해 이들이 숙청되는 것이 아닌 교체, 순환의 대상이 된다고 하였다.

1984년 북한은 개혁과 개방을 통해 사실상 1984년 합영법 제정 후 북한 대서방 합영 사업을 통해, 일본 조총련의 중심이 되어 이후 144건이 되고 1986년 낙원 금융회사를 비롯해 금융기관의 대외 합작을 착수했고, 외국기업 또한 유치를 위한 서해갑문 등 항만시설과 도로를 건설했다. 1987년 자유 상설 농민시장이 개설되어 국가가 부연한 생산목표 달성과 초과분이 시장에서 자유거래될 수 있게끔 허용되었다. 1991 12월 나진, 선봉 지역을 자유경제 무역을 위한 경제특구로 지정한다. 1990년대에 들어 북한 경제는 계속해서 마이너스 성장을 거듭 지속했으며, 1993 12월 열린 노동장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와 최고인민회의의 제3 7개년 계획이 원래 예견대로 수행되기 어려워졌다. 북한이 '농업 제일주의, 경공업 제일주의, 무역 제일주의'를 표방한 이윤느 간접적으로 북한의 식량난, 생필품난,외화난의 3대난에 처해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의 북한은 쌀 원조 요청을 통해 자신들의 경제사정이 심각한 상황에 놓였음을 대외적으로 밝히며 국제원조를 요청했다. 그러므로 중국 자본주의 최초 형성기의 특징은 이같이 역사적 배경이 규정한 셈이다. 자본주의는 매우 특이한 정치, 경제,사회적 기반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엘리트에 기초하지도 않고, 명백한 정치적 체제에 의존하지도 않았다. 중국 자본주의를 끌고 간 세력은 농민, 상인, 장인이, 되는 학자들이고, 갖춘 집단도 아니었다. 차라리 저들이 불분명한 정치적 및 경제적 역할을 오가며 수행하는 가족단위 세대주들이었다. 즉, 국가가 직접 통제하는 제도로서 조직된 경제가 아니고 한마디로 중국기업의 연결망은 정부 보호나 혹은 정부 계획, 감독과는 연계 없는 형성된 현상이 된다. 그것은 혈족 관계를 경제를 위한 조직 매개로 활용한 가족기업이 되고 현재 또한 계속 그렇게 운영되었다.

국가는 직접 통제하는 조직으로 존재하는 경제가 아니다. 19세기 중국 또한 국가가 소유하건 상인 층이 운영하는 중공업이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나 특별히 성공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 자본주의 최초 형성기의 특성은 이처럼 역사적 배경이 규정한 셈이다. 자본주의는 매우 특이한 정치, 경제,사회적 기반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것은 엘리트에 기초하거나 명백한 정치적 체제에 의존하지도 않는다. 중국의 자본주의를 끌고 간 세력은 농민, 상인, 장인 또는 학자들이 아니고 ,이들은 뚜렷한 계급으로 조직을 갖춘 집단도 아니었다. 차라리 경계가 불분명한 정치적-경제적 역할을 오가며 수행하는 가족단위의 세대주들이었다.즉 국가가 직접 통제하는 제도로써 조직한 경제가 아니고, 중국기업이나 연결망은 정부의 보호나 정부의 계획과 감독과는 연계가 없는 현상이 된다. 그것은 혈족 관계를 경제를 위한 조직 매개로 활용하는 가족기업이고, 현재까지도 계속 그렇게 운영했다. 국가가 직접 통제하는 조직으로 존재하는 경제가 아니란 말이다. 물론 19세기 중국 또한 국가가 소유하거나 상인층이 운영하는 중공업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나 저들이 특별히 성공적이지 않았다는 게 문제다.

결국, 자본주의 유형론에 의하면 중국의 자본주의는 슘페터의 처방보다 애덤 스미스 논리를 추종한 형태인 셈이다. 재화는 훨씬 더 효율적으로 배분하나 시장은 새로운 기술과 기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국 초기 근대화 과정의 혼란 속에서도 상업적 활동이 지속했던 것은 국가와 민간기업 사이의 상호작용 과정에 개입한 문화적 선택성에 기인한단 것을 확인 가능하다. 표면상으로는 저 제국의 관료체제가 은근히 무시하는 태도를 견지하는 사이의 경제계 기업가들은 축제를 위한 사업을 자기들 나름의 방법과 수단으로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현상의 이면에는 도덕적 정의를 무시하는 이윤추구를 일삼 하는 상업행위에 대한 유교적 멸시에 기초하여 아예 주요 상인들을 비생산적 계급으로 취급하는 문화가 지배하고 있었다. 유교적 정통에 익숙한 지배층의 핵심적인 문화적 관심사는 상업의 개발이라기보다 정치, 사회적 도덕의 문제였다. 따라서 기업 부문에 대하 은근한 무관심은 이런 문화적 원천에 연유한 것이다.
 

일본의 기업 지향적 정치 경제와 자본주의 형성
일본에서 또한 19세기 초부터 대내외적 변동의 불안정과 혼란이 극심해지면서 막부 집권적 통치 아래 무기력해진 봉건체제는 일종의 피로감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다이묘의 재정사정이 악화되고 전투 없는 사물이 계급은 일자리를 잃었고 흉작으로 인한 도시의 농촌의 빈민은 생계를 위협받았고 국내 불안정, 외세 위협의 불안 상태를 겪었다. 이러한 상황을 막부의 관료체제는 감당하지 못하여, 지방 영주들의 반발이 드높아졌다. 이런 사태를 통하여 막부의 권위에 도전하는 하급무사들의 반란을 통해 도쿠가와 시대는 막을 내리고 메이지 천황을 일본 국의 유일한 정통성 있는 통치권자로 회복시키는 데에 성공한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이다. 이 정변은 일본 사회를 근본에서 변화하는 거의 혁명적인 과업을 이끄는 무리는 하급 사무라이 중에서 엘리트 집단으로서 소수의 과두정치 집정자 집단이고 부국과 열방의 국가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서방의 군사기술을 위시하여 산업, 법률, 규범 헌법 사상, 과학, 기타 개혁에 필요한 제도적 모델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데에 나섰다. 개혁 움직임에 대한 내부의 저항과 반항이 없어지나 메이지 천황을 중심으로 형성한 민족주의와 전통적 종교 및 유교 전통 등에 힘입어 사회통합을 이룩하는데 성공하고 개혁에 속도가 붙게 된다.

이들이 우선 착수한 게 손수 구미 각국을 순방하면서 선진 서방 문물을 도입하여 앞장선 것이다. 이어 수많은 유학생을 파견하기 시작한다. 과두 집권 엘리트 가장 인상적이었다. 공업 자본주의 위력이다. 이야말로 부국강병의 첩경임을 인식한 그들이 착수하여 달성한 결과가 다름없는 일본 근대 자본주의 경제다. 국가의 개입이란 정치적 선택성과 문화적 선택성의 차이를 통해 기본적으로 서방 공업기술과 경제조직 원리를 도입해 일본 체제에 맞게 선택적으로 적용하는 국가와 엘리트 집단이 함께 공업화 달성을 위한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기획하고 집행한 것이다. 국가는 모든 것을 직접 통제하는 방식이 아닌 엘리트 집단이 국가기구를 이용해 민간 경제개발사업을 지원하고 증진하는 실용적 전략을 채택했다. 다만 경제 전략의 시대는 강한 권위주의 지배가 시행되지 못 했다.

다만 경제전략은 오히려 독일의 프레드릭 리스트 경제사 상의 차용했다. 요점은 위 같다. 물론이 시기에 엘리트 중에는 전통적인 세습적인 귀속지위에 의한 엘리트로 있었으나 근대교육으로 지위를 획득한 업적 지위를 누린다. 이렇게 공업화를 시작하는 정부부문의 엘리트가 적극적으로 간여하나 경제부문에서도 엘리트 집단이 형성된다. 대표적 보기가 바로 자이다 쓰 연결망이다. 규정한 자본주의 형식을 띤 일본은 이런 전략에 의해 소규모 수공업의 대규모 공업생산의 소규모 공장에서 재벌이란 형식의 대규모 관료적 기업집단에 대한 형식의 대규모 관료적 기업 집 단체로 성격을 바꾸며 경제개발을 성취한 게 특징이다. 이런 정치적 선택성의 이면에 일본 특유의 문화적 선택성이 작용한다. 초기 근대화 과정에 국가가 주도한 면이 없으나, 일본의 초기자본주의 형성에는 중국과 달리 국가 개입이란 정치적 선택성이 크게 작용한다. 동시에 민간부문의 기업가 엘리트와 제휴하는 형식의 개발을 추구한 것이 특징이다.
 

식민시대의 한국 자본주의 맹아
근대화 초기 조선 자본주의 생성은 국권 상실이란 비극이 가로막았으므로 동아시아의 다른 이웃나라와는 근원적으로 상이한 길을 걷게 되었다. 물론 19세기 말 20세기 초 조선에서도 왕의 주도로 미미하나 자본주의 경제를 일구는 개혁 노력이 없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워낙에 국내,외의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는 와중에 대한 제국으로 개명을 하고 황제에 즉위한 고종황제는 미처 손도 제대로 대보지 못하고 식민지로 전락한다나. 불가피한 식민통치 아래 전개되는 근대화 일환으로 자본주의 경제 시동도 걸린 점은 부인한단다 .여기 제시한 선택적 근대화론에서 볼 때 식민지 근대화도 근대화임에 틀림없다. 다만 민족 자율적 근대화의 타율에 의한 근대화란 이중적 과정을 포함한다.

이점은 특히 우리나라 자본주의의 초기 생성과정 워낙 국내외의 상황이 불리하게 들어가는 와중에 대한 제국으로 개명을 하고 황제에 즉위한 고종황제는 손도 제대로 대보지 못하고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불가피한 식민통치 아래에서 전개되는 근대화의 일환으로 자본주의의 경제의 시동도 걸렸다. 다만 겨이게 민족 자율적인 근대화와 타율에 의한 근대화란 이중적 과정을 포함한다. 특히 우리나라 자본주의의 초기 생성과정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우선 우리나라 사람이 자본주의적 기업 활동을 시작했다.

주로 19세기 말 제국주의 국가와 개항 조약 맺은 직후에 일부 대지주와 상인들이 우리의 곡물을 수출하고 외국 상품을 수입하여 축제를 한다. 활동을 본격적인 자본주의 경제의 틀 속에서 행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일본이 먼저 경제개발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고 발겠다. 일본의 주된 목표는 본국 근대화의 일환인 공업화를 촉진하여 도움이 될 수 있는 경제활동을 식민지에서 하는 일이고 동북아시아로 식민지를 확대하는 목표와 더 나아가 미국과 전쟁을 치르기 위한 식민 경제를 정착시키는 것이 경제적 지원 방향을 통해 식민지 경제를 정착하는 궁극적 목적 숨어있었다. 우선적으로 조선인의 공업화는 경제는 극히 한정적 수준에서만 허용하고 거기에 대해서도 일본의 자체는 공업화 과정에 취한 태도보다 훨씬 더 권위주의적 정부가 직접 개입하는 자세를 취하다
 
 



  사회주의 개념(https://en.wikipedia.org/wiki/Socialism)
사회주의란 무엇일까. 사회적 공공 소유의 틀과 민주적 공공의사 결정에 의한 통제로서, 사회적 체제와 경제적 결정권이 조율되는 정치 이데올로기와 이념 그리고 이의 설립을 목표로 하는 운동, 움직임을 말한다. 사회적 공공 소유권이란 공적이며, 협력적이며,집합되어 있는 소유권의 형태로 (혹은 이의 결합으로) 언급될 수 있다. 사회주의는 수많은 정의에 대한 많은 다양성과, 하나로 개념화할 수 없는, 압축된 개념이며, 사회적 통제권, 소유권은 다양한 형태에 의해 공유되고 보편적으로 나누어진다. 사회주의는 시장의 영역을 포함하는 것, 시장의 영역을 포함하지 않는 두 가지 영역으로 일반적으로 구분 가능하다.
 
 
동아시아 근대화와 자본주의 형성 및 전개

(Cf. 동아시아 근대화와 자본주의 형성 및 전개 : 대안적 이론에 의한 해석_김경동(서울대 명예교수)_아시아 리뷰, 2016

근대화에 있어서의 역사적 의의는 다음과 같다. 변화의 내용보다는 과정의 특성을 규명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그 결과의 과정에서 사회문화적 현상을 일컬어 근대성 modernity라 하는데, 근대의 시기 구분은 서방 역사학계가 자신의 역사 시기를 고대 ancient 중세 medieval 그리고 근대 혹은 근세 modern으로 구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서의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근대화란 인류 문명사에서의 근대란 시기를 여는 시점에서의 서부 유럽에서 시발된, 광범위한 사회, 문화적 변동을 말하는데, 이것은 서방이 지목한 근대에서의 16세기 초를 전후하여 유럽에서 일어난 각 분야의 문명론적 변화가 거의 동시적으로 발생한 시기에서의 르네상스, 콘스탄티노플 함락, 신세계발전과 자연과학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과 근대 자본주의를 포함하는 사회 각 분야의 혁명적 성질의 변동을 포괄한다. , 시로(Chirot 1994:5)가 지적한 것과 마찬가지로 "근대의 세계란 서부 유럽 일부 지역에서 발명되었고 근대성은 그로부터 전 세계로 전파해나간 것이다." 근대화 변화의 주요 특성으로서 이의 인용문에서 주목할 단어는 전파다. 근대화 과정이 중요할 때의 과정의 가장 두드러진 것이 바로 전파이며, 이로써 자본주의는 팽창주의적인 성격-성질을 띤다. 자본주의 목표 자체가 이윤 극대화이므로 시장이 필요하고 이로써 근대화를 촉발한 서유럽의 나라들의 규모가 작아진 것이다. 따라서 다른 세상으로 널리 확장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 저들이 발명한 근대화 소산으로서의 항해, 기업 활동 제도화, 전쟁 수행 등을 위한 자본과 기술이 커진 것이고 이의 해외 탐험이 이루어졌다. 19세기에 이르면 제국주의적 팽창주의가 발톱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이런 과정의 근대화는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팽창 과정은 일종의 국제적 문화접변 international accumulation을 초래하는데, 이의 문화가 접촉에 의해 변화되는 것이 과정이다. 이질적 문화를 접하는 사회는 부득불 선택적 적응 selective adaptation을 한다. 결과적으로 사회마다 제 나름 외래문화를 수용해 토착화되고 그 결과 곧 사회의 특유의 대안적 근대성 alternative modernity가 커진다. 근대화란 ) 국제적 문화접변 2) 적응적 변동에 대한 외래문화의 선택적 채용 selevtive adoption을 토착화하여, 대안적 근대성을 창출해나간다.
 

국제적 문화접변
문화접변은 안방에 의한 문화를 초래하는 것인데, 전 지구적 근대화의 문화접변은 일방적으로 기울어진 변화의 과정에 변질된다. 경제, 과학기술, 군사 등 각 부문의 세력 비대칭을 통한 비서방 후발국가가 서방발 근대국가화의 일방적 수용하는 위치에서의 근대화가 경험되었다. 이런 일방성으로 인해 서방 초기 근대화론자들의 근대화,서구화, 미국 화가 규정된다(Lvevy,1944 :Eisentadt 1964) 실제 근대화는 역사의 일방적 수렴이 아닌 다양성 산출과 다중 근대성(multiple modernities)를 가져와 대안적 근대성을 인식한다.
 
선택적 적응과 선택성의 원리
이런 대안적 근대성이 성립하는 과정에서 두 가지 선택성의 원리(Principles of selectivity)가 작용한다. 1) 정치적 선택성과 2) 문화적 선택성이다. 정치적 선택성은 외래문화를 접하면 이에 대응하는 자세와 전략을 결정하는데 작용하고 그러한 정치적 결정의 배경은 문화적 선택성이 개입한다는 원리다. 정치적 선택은 그 사회 각계각층의 사회적 세력들이 정치적 결정과정에 참여할 개연성을 좌우하는 구조적 유연성이 개입한다. 이런 정치적 결정의 저변에서 작동하는 문화적 선택성은 문화의 유연성, 개방성, 준비성, 친화성 및 양립 가능성 등에 대한 상이한 정치적 선택의 결과를 가져온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선택적 적응은 그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계층, 부문, 집단과 조직체로서 다른 이념, 신념, 가치관, 이해 관심 등을 둘러싸고 상호작용하여 가운데 상이한 세력과 특권과 영향력을 발휘하고자 갈등하는 결과로 근대화를 토착화하여 대안적 근대성이 생성된다. 동아시아 자본주의 생선과 전개 과정을 위한 근대화의 과정의 일환으로 이루어지는 모습을 분석하는 작업에서 이론적 합의를 되새길 기회가 있을 것이다.
 

동아시아의 제1기 근대화와 자본주의의 생성

초기 대응의 특징
동아시아 근대화의 시발 시점을 언제로 규정할지에 관한 규정과 견해차가 있을 수 있는데, 여기에 동아시아 3국 제국주의 국가와 개항 무역을 위한 조약을 공식적으로 체결하던 19세기로 보는 것이 근대 화론에 가장 합당하다고 할 수 있다. 지난 16세기 근대화를 개시한 서방세계가 동아시아와 외교무역 관계를 맺기 위한 움직임을 보이는데, 본격적 접촉에 의한 국제적 문화접변이 일어난 시기가 19세기다. 강력한 무력과 경제력을 과시하며 접근한 서방의 세력에 대한 동아시아 3국의 대응에는 한두 가지 묘한 공통점이 있었다. 첫째는 쇄국이고 둘째는 최초의 적응적 변동의 시도다.

주지사 하디시피 동아시아 3국은 당시만 해도 중국 중화사상의 영향 아래 외교나 무역을 역내에서만 허용하고 지역 외의 다른 나라와는 접촉을 금기시했다. 중국은 이념적 유고, 성리학의 세계관에 기초한 도덕적으로 우수한 중국 외에 해외는 물론 주변 나라와 이민족을 모두 야만으로 간주했다. 물론 조선과 왜국도 포함하는데 조선은 그나마 성리학의 정통성에 충실한 군자 나라로서 소중화라는 영예를 입고 위정척사의 자세를 고수한다. 일본은 중국이 야만이라 취급하는데 스스로는 신의 자손인 천황이 다스리는 나라로서 중국보다 우월하단 민족주의적 사상에 심취해있었다. 이런 이유로 3국은 공히 서방에 대한 쇄국을 고수하려 했다. 국제적 현실은 국수주의를 비웃기라도 하듯, 중국은 전쟁에서 패배하며 문호를 개방한다. 일본은 내부 세력교체에 의한 스스로의 객방을 선택하고 조선은 복합적 국제관계 속에서 불가항력적으로 개혁에 동참하게 된다. 물론 이 과정을 통해 세 나라 모두 공히 선택적 적응을 시도한다. 공통성도 있다. 중국은 주에 처용, 인본은 화혼 양재,조선은 동도서기가 그것이다. 모두가 물질적으로 서방 과학기술을 도입하되 정신적으로 동방의 도를 지킨다는 적응적 자세인 것이다. 여기에 세 나라의 근대화의 자본주의 전개 과정 도정이 달라졌다.
 
중국 자본주의 도래
중국의 초기 근대화는 자본주의가 생성한 배경에는 국가, 시장 간의 연계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강력하고 자율적 국가작용 또한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유럽에서 전 지구적 차원의 근대화를 시작할 때 중국은 민간부문 경제의 기업인들보다 더 철저하게 상업화한 경제를 지속적으로 활발히 운영했다. 그중 일부는 상당한 이윤을 취득한다. 중국인들은 태생적으로 장사를 잘해서, 기회를 막론하고 돈벌이를 좋아했다. 초기 근대화 시기부터 중국 사회는 물질적 자원의 희소성 문제가 컸고 사회이동도 활발했고 시장 통합도 잘 된 상황에서 사유재산 보호도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다름 아닌 국가 부문,즉 정치 영역에 대한 유일한 아킬레스건으로서의 약점이 있었는데, 청나라 정치적 중심으로서의 국가는 과도한 권력을 집중적으로 장악하고 있었고 국가 외의 어떤 행위자도 집단도 독립적으로 행동할 위치가 아니었고 지방 군벌들은 자치역량을 발휘할 경험이나 군사적 능력을 갖추지 못 했다. 이런 상황에서 늘어나는 인구를 흡수할 산업이나 상업의 개선은 결여된 채 중앙정부의 재정을 지탱할 수입원은 줄어들어 관료와 군부 부패가 만연한 가운데 농민을 위시한 대중 불만 또는 걷잡을 수 없이 높아가고 전국적으로 반란 혁명의 바람이 끊임없이 불었다 .개혁을 추진할 기력도 없고 개혁을 실시한다 해도 각종 정치세력의 전향으로 번번이 실패로 끝났다. 19세기 서방 제국주의 국가는 물론 일찍이 근대화에 성공한 신생 일본제국마저 막강한 군사력으로 위협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국가는 이런 대내, 대외 외적 위협에 적응된다.
 
북한식 사회주의
(Cf. 북한과 베트남의 개혁-개방 비교 연구_정상인(한림대 사회학과)_통일 문제 연구 95년 하반기로(통권 제24호)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란 이름의 사회주의 국가가 북한에 공식적으로 공표된 게 1948 9월이었다. 그것은 출범부터 한 달 전에 수립된 남한의 친미, 반공 정부와의 적대적 분단국가였다. 한반도의 두 국가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6년 이미 그 원형이 태동했다. 베트남과 마찬가지로 한국 또한 20세기 전반에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전락했고 상대는 일본이었다. 한국의 민족해방운동은 베트남에 비해, 통합성과 강도에 있어서 비효율적이었는데, 남한의 독립운동은 이념적으로 분파적이고, 일본의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특히, 일본 항복 후의 미국과 소련은 한국을 분할 점령했고 한반도에 찾아온 냉전은 인도차이나반도보다 다소 빨랐다. 북한 정권의 기원은 일제 식민지 중반기의 김일성이 만주에서 항일 게릴라 활동을 한 것에 의함이었다. 1925년 창당된 조선노동당은 민족해방운동에 바탕을 두 사회주의 혁명의 내생적 조건과, 소련 세계 공산화 전략에 대한 외부적 이식을 혼합한 공산당으로서 김일성 권력의 모태였다. 1940년대 말 북한은 토지개혁을 비롯한 반제, 탈 식민지 혁명을 시도했다. 해방 직후인 1940년대 말, 북한은 사회혁명에 이어 본격적 사회주의 혁명에 착수한다. 생산양식의 사회주의적 개조를 통한 생산수단의 집단화, 국유화 원칙을 통해 농촌에서의 농업협동 화가 추진되고 도시에서는 소상품 생산양식과 자본주의 상공업이 사회주의적인 것이 된다. 19548 8월까지 북한에서의 생산양식은 사회주의에 대한 전일적 지배로서 확 납되었다. 사회주의 혁명을 단기적,성공적으로 완수한 북한은, 사회주의 경제발전을 위한 혁명을 시도했다.

기본 노선은 중공업 우선 발전, 경공업과 농업의 동시 발전이란 전형적 스탈린 모델로서, 3개년 인민 경제계획(1954-56), 1 5개년 계획(1957-1961)이 각각 실시되고 1960년대 초 북한은 사회주의 공업/농업국가가 되었다. 인민 경제계획 기간 동안 북한의 공업 총생산량은 연간 42%였고 농업 생산량 역시 전쟁 전 수준을 능가하며 제1 5개년 계획 동안 공업 총생산량 연평균 성장률이 36%에 달하며, 국내 총 생산 가운데 공업 부문이 차지하는 비율은 0%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주체 방식에 의한 주체 경제는 가능한 한 국내 자원의 동원과 내수시장 확대에 기초하여 대외 의존을 배격하고 자급 경제 내지 주력 생산을 통한 보다 자주적이고 일국적인 측면에서의 경제체제다.
 1950년 북한은 사회주의 체제의 건설을 한반도 전역으로 확대하려는 시도로서 한국전쟁을 벌였다. 한국전쟁은 곧 냉전에 의한 첫 국제전이었다. 김일성의 야망은 미국에 의해 좌절되고 1953년 이후 한반도에서의 분단은 더욱 고착화된다. 김일성은 한국전쟁을 통해 남한이 지원하던 친미, 반공국가를 붕괴하는데 실패하고 전쟁으로 인한 엄청난 사회경제적 피해를 입는데, 정치적으로 볼 대 권력 공고화를 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했다. 김일성은 전후 정적 숙청을 했고 개인숭배를 강화했다.   중요한 건 1950년대 중반부터 나타난 주체사상에서의 북한 체제 정치 경제 이데올로기인데, 주체사상은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한국 민족주의의 결합으로 신성불가침 이데올로기가 된다. 주체사상은 1인 지배 제하에서의 유일지배체제를 형성했고 비 실용주의 비탄력적인 방법을 통한 통치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했다. 유물론의 사관으로부터 북한 사회주의 체제가 내용적으로는 사상과 이념 중심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1960년대 들어 북한 경제 성장 속도는 하강 국면에 접어든다.무엇보다 북한을 통한 지정학적 환경이 불리하게 전개되었으며, 북한이 군사비 투자를 증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960년대 초 남한의 반공을 국시로 하는 군사정권이 출범하고 베트남전쟁이 격화되어 동북아 간 긴장 수준이 높아지고 한일 국교정상화가 모색되던 시점이 커졌다. 북한은 국방 건설과 경제건설을 병진하였고 1950년대 성과를 바탕으로 추진되었던 1960년대의 제1 7개년 계획(1961-67) 3년 동안 연장해 10년 만에 겨우 목표 달성이 가능했다. 1970년대 초, 북한은 '사회주의 공업국가'가 되었다고 선언했다. 북한은 청산리 방법, 대안의 사업체계와 같은 약간의 개혁을 통한 여전히 정치적 대중 동원 캠페인 방식을 통한 경제발전의 견인차가 되었다. 1 7개년 계획기간 중 공업생산력은 연평균 13%를 유지하나, 전반적으로 북한 경제 성장세는 1960년대 이르러 둔화되고 있음이 분명했다. 북한의 6개년 계획(1971~76)은 농업부문과 소비재 생산에 대한 국가적 관심이 상대적으로 높아져, 1960년대의 제1 7개년 계획은 3년을 연장해 10여 년 만에 겨우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1970년대 초 북한은 사회주의 공업국가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이 기간 동안 북한은 청산리 방법, 대안 사업체계와 같이 약간의 개혁을 시도하며 정치적 대중 동원 캠페인 방식에 의한 경제발전을 견인했다. 1 7개년 계획 기간 중 공업생산력과 성장이 연평균 13%를 유지하나, 전반적으로 북한 경제 성장세는 1960년대 말 이르러 둔화되고 있었다 1970년대 초반, 북한은 대외개방을 시도했다. 1980년대 북한은 그것을 통한 필적할만한 내부적 정책 전환을 통하여 1984년 북한은 획기적인 전환의 해였다. 사실상 1980년대 점증하는 경제적 침체 상황을 위한 북한 지도부의 인식 변화가 나타났다. 1979년 신년사에서 김일성은 처음 대외무역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수출품 생산 증대를 강조한다 또한 1980년대 열린 조성 노동당 제5차 당대회에서 제2 7개년 계획의 완수를 목표로 하는 소위 10대 전망 목표를 발표하며 1980년대 말까지 수출액의 증가를 목표 경제성장률 3.1배를 상회하는데 4.2배로 설정한다. 이어 김정일은 1982 3월 발표한 "주체사상에 대하여"란 논문을 통해 "자력 갱생의 원칙에 의한 자립적 민족경제를 달성한다는 것에 대한, 문을 닫아 매고 경제를 건설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대외 경제관계의 확대가 주체사상에 반하지 않고 오히려 주체사상에 의해 대외개방이 정당화된다는 길을 열었다.

합영법으로 대표되는 대외 경제관계의 수정은 1984 1 26-28일 제7 3차 최고인민회의에서 "남남 협력과 대외무역을 강화하고 무역활동을 더욱 발전시킬 데 대하여"란 결의를 바탕에 둔다. 이를 받아들여, 9 8일 합영법과 시행세칙이 발표됐고 1985년에 외국인 소득세법,합영회사 소득세법 등 세칙 등이 있다라 시행된다. 1984 10월 윤기복 중앙인민위원회 경제정책 위원장은 합영법의 제정 취지에 대한 우리나라의 이미 자립적 민족경제를 확실히 구축하였으며,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나라, 일본,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나라에 회사, 기업소, 개인을 합영의 대상으로 하여 그들에 대한 특별한 제한이나 차별이 없으며, 우리나라에 대한 적대시 정책을 추진하고 나라의 당국자와 개별적 회사, 기업 소, 개인을 구별한다.

대외 경제관계를 통해 북한은 일련의 개혁 작업을 추진했다. 1984년 신년사를 통해 김일성은 인민생활의 획기적 향상을 강조했고 2 16일 김정일은 인민생활을 위한 연설을 하였다. 이후 김정일은 인민생활 향상을 통한 식량문제의 해결을 가장 우선시했고, 이를 통해 김정일은 '식의 주' 쪽이 훨씬 더 현실적이라 했다. 농업부문에서 또한 북한은 생필품 생산을 위한 경공업 발전에 대한 정책적 관심을 표현한다. 1984 8 3일 김정일은 경공업 제품 전시장 시찰과 인민생활의 독려를 함께하는, 8.3 인민소비 생산 운동을 발표한다. 1990년 대 신년 사에서 김일성은 경공업 혁명을 강조했다.

이처럼 1984년 이후 경제정책에서의 기구 개편,담당 관료들의 인사교체가 눈에 띄게 늘었다. 기구 개혁 관련하여, 1985 6월 각 도, 시, 군 당 위원회 책임비서가 해당의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겸하며 지역 경제지도 위원회를 행정 경제지도 위원회로 개편한다. 당시 지방 권력구조가 당 위언회,인민위원회, 경제지도 위원회란 세 축을 중심으로 구성된다면 이후 실질적 당 위원회와 행정 경제지도 위원회의 두 중심으로 바뀐다.  이는 당이 기본적 결정권을 장악하며 당의 행정대행 주의가 비판되고 정책집행 관련한 당이 필요 이상으로 행정기관에 개입하지 않고 수정한 것을 의미한다. 지방행정기관 재편만이 아닌 기업에 대한 제도적 변경 또한 이 무렵 실시되는데 1984년 신년사를 통해 김일성은 경제 관련 개선을 강조하고 3월 김정일은 독립채산제를 현실에 맞게 경제적 자극을 이용하는 방침으로 바꿀 것을 지시한다. 2월 국영 기업소득,독립채산제에 관한 규정이 재정되어 기업자 주권의 제한적 권리를 확대하여 법적으로 뒷받침한다. 이어 7월 연합 기업소를 합리적으로 조직 운영하는 조치가 발표되는데 그 골격을 보면 연합기업소는

1) 母體 공장을 중심으로 이러한 지역 내의 생산적, 연계가 밀접한 부문의 공장, 기업소를 망라해 조직된 것 2) 일정 지역 내의 동일 부문의 공장과 하청 기업소를 조직한 것 3) 전국적 범위의 부문 혹은 서로 다른 부문의 연관된 공장과 기업소를 총체적으로 망라해 조직된 것이다. 이를 관리 및 운영하기 위한 북한은 국가기관의 권한을 통해 연합기업소에 부분적으로 이양하고 기업소들의 책임성, 창의력 발휘를 위한 국자 지도를 간소화시켰다. 아울러 중앙 병기관 관련 재편 작업도 추진되는데 그 내용은 기존 기관들 통합 분할과 새로운 기관 설치 두 가지다. 우선 전자의 경우 경제 관련 정부 내 유사 부처 간의 통합이 중심이고, 후자의 경우 984 1월 제7 3차 최고 인민위원회에서 중앙인민위원회 경제정책 위원회가 신설되고 정무원 도시 경영부 ,지방공업부 ,합영공업부 등과 같은 대외 경제위원회가 새로 조직된다. 이의 경우 경제조직의 개편 관련해 담당 경제 관련하여, 경제관료가 대폭 교체되었다. 이후 김일성, 김정일 세대 사이의 1.5세에 속하는 테크노크라트들은 북한 경제관료의 인사개편성의 특징을 통해 이들이 숙청되는 것이 아닌 교체, 순환의 대상이 된다고 하였다.

1984년 북한은 개혁과 개방을 통해 사실상 1984년 합영법 제정 후 북한 대서방 합영 사업을 통해, 일본 조총련의 중심이 되어 이후 144건이 되고 1986년 낙원 금융회사를 비롯해 금융기관의 대외 합작을 착수했고, 외국기업 또한 유치를 위한 서해갑문 등 항만시설과 도로를 건설했다. 1987년 자유 상설 농민시장이 개설되어 국가가 부연한 생산목표 달성과 초과분이 시장에서 자유거래될 수 있게끔 허용되었다. 1991 12월 나진, 선봉 지역을 자유경제 무역을 위한 경제특구로 지정한다. 1990년대에 들어 북한 경제는 계속해서 마이너스 성장을 거듭 지속했으며, 1993 12월 열린 노동장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와 최고인민회의의 제3 7개년 계획이 원래 예견대로 수행되기 어려워졌다. 북한이 '농업 제일주의, 경공업 제일주의, 무역 제일주의'를 표방한 이윤느 간접적으로 북한의 식량난, 생필품난,외화난의 3대난에 처해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의 북한은 쌀 원조 요청을 통해 자신들의 경제사정이 심각한 상황에 놓였음을 대외적으로 밝히며 국제원조를 요청했다. 그러므로 중국 자본주의 최초 형성기의 특징은 이같이 역사적 배경이 규정한 셈이다. 자본주의는 매우 특이한 정치, 경제,사회적 기반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엘리트에 기초하지도 않고, 명백한 정치적 체제에 의존하지도 않았다. 중국 자본주의를 끌고 간 세력은 농민, 상인, 장인이, 되는 학자들이고, 갖춘 집단도 아니었다. 차라리 저들이 불분명한 정치적 및 경제적 역할을 오가며 수행하는 가족단위 세대주들이었다. 즉, 국가가 직접 통제하는 제도로서 조직된 경제가 아니고 한마디로 중국기업의 연결망은 정부 보호나 혹은 정부 계획, 감독과는 연계 없는 형성된 현상이 된다. 그것은 혈족 관계를 경제를 위한 조직 매개로 활용한 가족기업이 되고 현재 또한 계속 그렇게 운영되었다.

국가는 직접 통제하는 조직으로 존재하는 경제가 아니다. 19세기 중국 또한 국가가 소유하건 상인 층이 운영하는 중공업이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나 특별히 성공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 자본주의 최초 형성기의 특성은 이처럼 역사적 배경이 규정한 셈이다. 자본주의는 매우 특이한 정치, 경제,사회적 기반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것은 엘리트에 기초하거나 명백한 정치적 체제에 의존하지도 않는다. 중국의 자본주의를 끌고 간 세력은 농민, 상인, 장인 또는 학자들이 아니고 ,이들은 뚜렷한 계급으로 조직을 갖춘 집단도 아니었다. 차라리 경계가 불분명한 정치적-경제적 역할을 오가며 수행하는 가족단위의 세대주들이었다.즉 국가가 직접 통제하는 제도로써 조직한 경제가 아니고, 중국기업이나 연결망은 정부의 보호나 정부의 계획과 감독과는 연계가 없는 현상이 된다. 그것은 혈족 관계를 경제를 위한 조직 매개로 활용하는 가족기업이고, 현재까지도 계속 그렇게 운영했다. 국가가 직접 통제하는 조직으로 존재하는 경제가 아니란 말이다. 물론 19세기 중국 또한 국가가 소유하거나 상인층이 운영하는 중공업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나 저들이 특별히 성공적이지 않았다는 게 문제다.

결국, 자본주의 유형론에 의하면 중국의 자본주의는 슘페터의 처방보다 애덤 스미스 논리를 추종한 형태인 셈이다. 재화는 훨씬 더 효율적으로 배분하나 시장은 새로운 기술과 기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국 초기 근대화 과정의 혼란 속에서도 상업적 활동이 지속했던 것은 국가와 민간기업 사이의 상호작용 과정에 개입한 문화적 선택성에 기인한단 것을 확인 가능하다. 표면상으로는 저 제국의 관료체제가 은근히 무시하는 태도를 견지하는 사이의 경제계 기업가들은 축제를 위한 사업을 자기들 나름의 방법과 수단으로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현상의 이면에는 도덕적 정의를 무시하는 이윤추구를 일삼 하는 상업행위에 대한 유교적 멸시에 기초하여 아예 주요 상인들을 비생산적 계급으로 취급하는 문화가 지배하고 있었다. 유교적 정통에 익숙한 지배층의 핵심적인 문화적 관심사는 상업의 개발이라기보다 정치, 사회적 도덕의 문제였다. 따라서 기업 부문에 대하 은근한 무관심은 이런 문화적 원천에 연유한 것이다.
 

일본의 기업 지향적 정치 경제와 자본주의 형성
일본에서 또한 19세기 초부터 대내외적 변동의 불안정과 혼란이 극심해지면서 막부 집권적 통치 아래 무기력해진 봉건체제는 일종의 피로감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다이묘의 재정사정이 악화되고 전투 없는 사물이 계급은 일자리를 잃었고 흉작으로 인한 도시의 농촌의 빈민은 생계를 위협받았고 국내 불안정, 외세 위협의 불안 상태를 겪었다. 이러한 상황을 막부의 관료체제는 감당하지 못하여, 지방 영주들의 반발이 드높아졌다. 이런 사태를 통하여 막부의 권위에 도전하는 하급무사들의 반란을 통해 도쿠가와 시대는 막을 내리고 메이지 천황을 일본 국의 유일한 정통성 있는 통치권자로 회복시키는 데에 성공한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이다. 이 정변은 일본 사회를 근본에서 변화하는 거의 혁명적인 과업을 이끄는 무리는 하급 사무라이 중에서 엘리트 집단으로서 소수의 과두정치 집정자 집단이고 부국과 열방의 국가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서방의 군사기술을 위시하여 산업, 법률, 규범 헌법 사상, 과학, 기타 개혁에 필요한 제도적 모델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데에 나섰다. 개혁 움직임에 대한 내부의 저항과 반항이 없어지나 메이지 천황을 중심으로 형성한 민족주의와 전통적 종교 및 유교 전통 등에 힘입어 사회통합을 이룩하는데 성공하고 개혁에 속도가 붙게 된다.

이들이 우선 착수한 게 손수 구미 각국을 순방하면서 선진 서방 문물을 도입하여 앞장선 것이다. 이어 수많은 유학생을 파견하기 시작한다. 과두 집권 엘리트 가장 인상적이었다. 공업 자본주의 위력이다. 이야말로 부국강병의 첩경임을 인식한 그들이 착수하여 달성한 결과가 다름없는 일본 근대 자본주의 경제다. 국가의 개입이란 정치적 선택성과 문화적 선택성의 차이를 통해 기본적으로 서방 공업기술과 경제조직 원리를 도입해 일본 체제에 맞게 선택적으로 적용하는 국가와 엘리트 집단이 함께 공업화 달성을 위한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기획하고 집행한 것이다. 국가는 모든 것을 직접 통제하는 방식이 아닌 엘리트 집단이 국가기구를 이용해 민간 경제개발사업을 지원하고 증진하는 실용적 전략을 채택했다. 다만 경제 전략의 시대는 강한 권위주의 지배가 시행되지 못 했다.

다만 경제전략은 오히려 독일의 프레드릭 리스트 경제사 상의 차용했다. 요점은 위 같다. 물론이 시기에 엘리트 중에는 전통적인 세습적인 귀속지위에 의한 엘리트로 있었으나 근대교육으로 지위를 획득한 업적 지위를 누린다. 이렇게 공업화를 시작하는 정부부문의 엘리트가 적극적으로 간여하나 경제부문에서도 엘리트 집단이 형성된다. 대표적 보기가 바로 자이다 쓰 연결망이다. 규정한 자본주의 형식을 띤 일본은 이런 전략에 의해 소규모 수공업의 대규모 공업생산의 소규모 공장에서 재벌이란 형식의 대규모 관료적 기업집단에 대한 형식의 대규모 관료적 기업 집 단체로 성격을 바꾸며 경제개발을 성취한 게 특징이다. 이런 정치적 선택성의 이면에 일본 특유의 문화적 선택성이 작용한다. 초기 근대화 과정에 국가가 주도한 면이 없으나, 일본의 초기자본주의 형성에는 중국과 달리 국가 개입이란 정치적 선택성이 크게 작용한다. 동시에 민간부문의 기업가 엘리트와 제휴하는 형식의 개발을 추구한 것이 특징이다.
 

식민시대의 한국 자본주의 맹아
근대화 초기 조선 자본주의 생성은 국권 상실이란 비극이 가로막았으므로 동아시아의 다른 이웃나라와는 근원적으로 상이한 길을 걷게 되었다. 물론 19세기 말 20세기 초 조선에서도 왕의 주도로 미미하나 자본주의 경제를 일구는 개혁 노력이 없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워낙에 국내,외의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는 와중에 대한 제국으로 개명을 하고 황제에 즉위한 고종황제는 미처 손도 제대로 대보지 못하고 식민지로 전락한다나. 불가피한 식민통치 아래 전개되는 근대화 일환으로 자본주의 경제 시동도 걸린 점은 부인한단다 .여기 제시한 선택적 근대화론에서 볼 때 식민지 근대화도 근대화임에 틀림없다. 다만 민족 자율적 근대화의 타율에 의한 근대화란 이중적 과정을 포함한다.

이점은 특히 우리나라 자본주의의 초기 생성과정 워낙 국내외의 상황이 불리하게 들어가는 와중에 대한 제국으로 개명을 하고 황제에 즉위한 고종황제는 손도 제대로 대보지 못하고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불가피한 식민통치 아래에서 전개되는 근대화의 일환으로 자본주의의 경제의 시동도 걸렸다. 다만 겨이게 민족 자율적인 근대화와 타율에 의한 근대화란 이중적 과정을 포함한다. 특히 우리나라 자본주의의 초기 생성과정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우선 우리나라 사람이 자본주의적 기업 활동을 시작했다.

주로 19세기 말 제국주의 국가와 개항 조약 맺은 직후에 일부 대지주와 상인들이 우리의 곡물을 수출하고 외국 상품을 수입하여 축제를 한다. 활동을 본격적인 자본주의 경제의 틀 속에서 행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일본이 먼저 경제개발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고 발겠다. 일본의 주된 목표는 본국 근대화의 일환인 공업화를 촉진하여 도움이 될 수 있는 경제활동을 식민지에서 하는 일이고 동북아시아로 식민지를 확대하는 목표와 더 나아가 미국과 전쟁을 치르기 위한 식민 경제를 정착시키는 것이 경제적 지원 방향을 통해 식민지 경제를 정착하는 궁극적 목적 숨어있었다. 우선적으로 조선인의 공업화는 경제는 극히 한정적 수준에서만 허용하고 거기에 대해서도 일본의 자체는 공업화 과정에 취한 태도보다 훨씬 더 권위주의적 정부가 직접 개입하는 자세를 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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