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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동북아 다자안보 체제는 가능할까?

 

장혜원 (언론과 민주주의, hodujang@naver.com)

 

들어가며

올해 초부터 한반도에 이어지기 시작한 평화담론이 무르익고 있다. 비핵화의 일상화가 이어지고 있다. 평화를 넘어선 경제 통일도 거론되는 중이다. 2016년부터 고고도 미사일 방어 (Theater High Altitude Area Defense: THAAD) 배치를 공식화됐으며 지난해 10월 북한은 대륙 간 탄도미사일 ICBM에 핵탄두를 장착해 미국을 불바다로 만들겠다 으름장을 놓으며 북미관계가 악화일로로 치달으며 미국의 북한 선제공격론이 대두된게 과거의 이야기가 된 듯한 기분이다.

 

 지난달 24일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연신 북·미 관계와 한·미 관계의 중요성에 대해서 설명했다. 25일 유엔총회 연설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용기(미사일 실험장 폐기)등 그가 취한 조치에 감사한다라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러한 트럼프 대통령의 반응에 트럼프 대통령만이 비핵화와 체제보장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라고 화답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어 지난달 26일 열린 미·일 정상회담에서 김정은의 친서를 꺼내 보이며 “역사적인 편지였다. 아름다운 한 편의 예술 작품이었다”고 말했다. 북한과 협상을 재개하겠다는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공식 발언은 평양공동선언 공개 후 15시간 만에 나왔다.

 

919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은 9월 평양공동선언을 통해 한반도·동북아 정세를 이끌었다. 지난달 18일부터 23일간 진행된 이번 남북 정상 회담은 올해 세번째 열렸고 문 대통령의 평양 방문은 취임 후 첫번째였다. 김대중-김정일(2000.6.13.~15), 노무현-김정일(2007.10.2.~4)에 이어 정부 역대 3번째 남북 정상회담 이었다. 이번 평양 정상회담의 의제는 남북관계 발전군사적 긴장 완화한반도 비핵화 촉진이었다.

북한과 미국은 지난 6월 싱가포르 정상회담을 통해 직접 소통 채널을 열고 비핵화를 천명했다. 이에 북한은 조건 없이 핵·장거리 미사일 시험발사 중단과 풍계리 핵시험장 폐기를 단행했다. 또한 억류 미국인들을 석방했다. 이러한선의의 조치가 북-미 간 초보적인 신뢰를 만들어냈다. 뿐만 아니라 이는 북-미 정상회담을 성사시키는 발판이 되었다.

 

육성으로 비핵화 의지를 보이지 않았던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달 193차 남북한 정상회담 이후 조선반도를 핵무기도, 핵 위협도 없는 평화의 땅으로 만들기 위해 적극 노력해 나가기로 확약했다라고 전했다. 이날 육상과 해상, 공중을 포함한 모든 공간에서 일체의 적대행위를 금지하고 비무장지대(DMZ) 내 감시초소 시범철수를 비롯한 DMZ의 평화지대화 방안 등이 담긴 군사분야 합의서 채택되며 한반도 안보 평화체제와 완전한 비핵화에 대한 의지가 높아졌다. 특히 이날 평양공동선언이 공개되는 기자회견이 있고 1시간여 만에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시간으로 새벽에 해당하는 자정 경 “매우 흥분된다”라는 트위터를 남겼으며 아침에는 “엄청난 진전”이라고 이어 밝히며 남북간 관계의 고도화에 큰 호의를 나타냈다.

 

북한은 지난 9월 9일 성대한 정권수립 70주년(9·9절) 행사를 가진 북한은 이날 무력 대신 경제를 강조했다. 북한은 종전 선언으로 대북제재가 아닌 경제지원을 받을 수 있는 명분이 확대되며, 유엔사의 정전협정을 기반으로 한 한미연합훈련 명분이 정정되어야 하며, 기존의 한·미 동맹의 성격이 달라져 미군 철수를 유인할 수 있게 된다. 마이크오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10월 초쯤 방북해 2차 북·미 정상회담의 의제와 일정 등을 논의할 예정이다.

비핵화 시계가 빨라지면서 북한의 비핵화 조치를 통한 종전선언과 한반도의 영구적 평화 체제에 대한 가능성이 열릴 것이다. 이처럼 완전한 비핵화를 통한 한반도 종전선언과 이를 통해 한반도 평화협력체제의 보편화와 수립을 위한 경제발전을 통해 북한의 정상 국가화가 가능할 수 있을지 이를 칸트의 영구 평화론을 중심으로 분석한 후 유럽과 한국의 전후 안보·경제 협력을 기반으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

 

한반도 분단 체제의 전개

한반도 평화체제 정착을 위해 필요한 건 미국과 중국 그리고 한반도 평화 이니셔티브 정착을 위한 한반도와 동북아의 협력체제의 구축과 고도화다. 이를 위해서 단순 남북 간 대화를 넘어서 다자간 실리적 합의점을 모색해 낼 수 있는 북미관계와 남북관계가 개선되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궁국적으로 동북아시아 국가 간 관계 정상화를 이루도록 하는 재반 노력이 수반 되어야만 한다.

 

한반도는 1945 8 15일 일본제국의 식민 통치가 끝난 후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해 3년 간의 전쟁을 겪고 곧 남과 북으로 분단됐다. 전후 한··일 삼각 동맹과 북··러 삼각 동맹은 동아시아 냉전 질서의 핵심이었다. 나아가 지역질서는 남북한 각각의 발전 전략의 성질을 결정 지어왔다. 북핵문제 논의 없는 한반도 비핵화 체제를 전제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1980년대 말 이후 전 세계적인 냉전종식과 더불어 한반도에서의 냉전시대의 동북아시아 적대 체제를 해체하고 새로운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노력이 진행되면서 북핵위기가 함께 터지며 안보불안이 고도화됐다.

 

이처럼 전후 역사에서 분단 국가인 한반도는 동북아 냉전질서의 중심이었다. 동북아의 다자간 안보협력과 평화체제를 위해서 한반도 평화가 절실 했었으나 이루어지기 어려웠던 이유는 이처럼 냉전과 과거의 문제가 기반이 되어 왔기 때문이었다.

 

정전 상황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연합국인 미국 과 소련이 편의상 나눈 영역을 38선 분단선으로 삼아 오늘날에 이르렀다. 한국 전쟁은 냉전 질서를 구조화 했을 뿐만 아니라 전 후 체제에 있어 냉전이 고착화됐다. 지난 세기와 더불어 현재의 세기를 더하는 20세기 냉전질서와 21세기 탈 냉전 질서가 다시 이행되고 있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남과 북의 군사와 미국의 맥아더와 중국의 장개석(Chiang Kai-shek·蔣介石)은 동북아에서의 반공 전선을 키우려 했고 중국의 공산정권은 북한을 더불어 이러한 미국과 대만의 공세를 방어하려 했다.

 

한국전쟁은 이후 한미일 삼각 동맹의 근거를 제공했다. 한미일 삼각 동맹은 미국 동북아 동맹 전략의 핵심이 됐다. 미국과 중국의 관계 개선으로 중국이 유엔 안보리 상임 이사국을 차지했으며 1972년 중일 외교관계 정상화 이후에 1979년 미·중 양국 외교관계의 정상화는 카터 행정부인 1979년 이후 가능해 졌다. 1971년 남북 적십자 회담 이후 7·4 공동성명 채택으로 이어지는 한반도 데탕트(détente)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박정희 정부는 데탕트를 위기로 인식했고, 북한이 정상회담을 제안하지만 거부했다. 7·4 공동선언도 당시 박정희 정권의 정치적 우선순위가 국내 유신 정치체제를 통해 전개됐던 끝에 남북관계와 대외정세 변화가 중요한 명분이 됐다. 노태우 정부 들어 남북 기본합의서를 채택했고 유엔 동시가입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성사했다. 1996 4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반도 평화체제를 위한 4자 회담이 제의됐고 이후 이명박 행정부가 집권하기 전후였던 2007년까지 수차례 다자간 정상회담이 이루어지며 평화체제 구축과 동북아 긴장완화를 위한 다양한 노력이 이행됐다.

 

특히 2005919일 있었던 제4차 북경 6자 회담 결과물 에서는 동북아시아의 항구적 평화와 안정을 위해 노력할 것을 공약하며 적절한 별도의 포럼에서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에 관한 협상을 가질 것을 공언하기도 했다. 2007103일 마지막으로 합의된 66자회담 2단계 회에서는 한반도 비핵화와 미·북 및 일·북 관계정상화, 경제 및 에너지 협의 등 구체적 내용이 들어갔고 2단계 조치에 합의하며 한반도 평화체제의 기대를 더 진전시키기도 했다.

 

당시 남한과 북한에 진주하던 미국과 소련은 서로 다른 정치적 이념을 배경으로 남북의 정치세력들이 각각 정치이념이 더 우월한 것으로 경쟁하고 있었다. 이에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를 정치이념으로 하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현재까지 휴전 상태에 있다. 분단 후 70년이 되어가는 오늘날까지 북한은 4차례의 핵실험과 장거리 로켓 발사 외에도 여러 차례의 군사도발을 강행했다. 2010년 서해에선 천안암·연평도 사건이 발생하며 군사적 대치가 극단에 이르기도 했다. 191111월 금강산 관광 사업이 시작됐으며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 본격화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6년 북한의 핵실험 등으로 인해 남북간의 화합은 곧 대립이 됐고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제재는 더욱 거세졌다.[1] 남한과 국제사회는 그러한 북한에 대북 제재와 국제 고립으로 맞대응해온 것이다.

 

이에 한반도는 구조적 고립과 분단에 맞대응해 갈등의 완화와 해소를 위한 평화 정착 방안에 대해서 고민 할 수 밖에 없게 되어 왔다. 평화의 의미는 사람들에 따라 전통적인 개념으로서 국가 간전쟁의 부재상태나 비판적 개념으로서구조적 폭력으로부터의 해방등으로 다양화 됐다. 동북아시아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전후 질서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동북아시아와 국가 사이 과거사 문제와 영토간 군사 대치가 지속되고 있으며 분단은 극복되지 못했다.

칸트의 영구 평화론

 

칸트의영구평화론’(Perpetual Peace)[2] 자유주의적 관점을 갖는 국제정치학 이론 중 자유평화론(liberal peace) 또는 민주평화론(democratic peace)으로 발전 및 확장되어왔다.[3]

 

민주평화론은 칸트의 영구 평화론은 민주주의나 자유주의보다 공화주의라는 용어가 더 많이 사용됐다. 전제주의와는 반대되는 다수에 의한 통치라는 의미와 상통한다. 공화헌법은 고대 로마시대 한 시기의 대표적인 통치형태의 기초였다. 군주정이 지배적이던 중세시대, 절대군주정이 대표적 통치 형태였던 근세 말 칸트는 공화주의 개념을 통해 평화문제를 다루었다. 칸트가 활동한 시기의 통치정이었던 독일의 프러시아는 공화정이 아닌 전제정이었다.

 

대의제적 성격이 아니었으며 개인 혹은 소수집단에 의해 절대권력이 행사됐던 정부 형태였다. 칸트가 영구 평화론을 저술한 18세기 말까지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의 절대주의적 군주 전제정을 채택하고 있었다. 칸트는 프랑스 시민혁명에 대한 간섭으로서 시작된 프랑스와 이웃 국가들인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간의 전쟁과 그것을 종결하는 바젤평화조약이 1795년 체결되는 것을 보며 해당 평화조약이 종전의 수많은 평화조약들 중 일시적 휴전에 불과하다고 여겨 항구적 평화정착 방안을 제안했다. 국제레짐도 들 수 있다.

 

1947년 이후 성립된 국제무역레짐은 2차 대전 후의 국제무역을 관장하기 위한 국제기구(ITO)를 설립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참여국들의 신념을 반영했다. 당시 ITO를 설립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산되었기 때문에 GATT라는 국제무역레짐이 대신 성립됐다. 따라서 GATT 의 경우에는 애초에 의도한 국제무역기구의 필요성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WTO(세계무역기구)라는 국제무역수준의 국가레짐 체제가 이룩됐다. 대표적 안보레짐은 냉전시대 군비경쟁 완화를 위해 사용된 전략무기제한협정인 SALT와 핵확산 금지조약인 NPT를 들 수 있다.

 

칸트의영구평화론은 그 서술에 있어서 가상적인 조약의 형식을 취하는데, 해당 조항들은 공화헌법의 구성요소로서, 칸트는 국제사회의 항구적 평화를 취하기 위해서는 모든 인간들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유를 향유하며 단일한 법령에 의존하고 법적 평등을 향유해야 한다고 본다. 공화주의적 헌법을 통해 일반 개인들은 자유와 평등권을 누리며 법 앞에 평등하기 때문에 정치공동체를 유지하게 될 경우 평화가 유지된다는 논리다. 정치공동체 속에서 인간 존엄성을 바탕으로 상호간 자유와 평등을 존중해야 하며, 공동체 대표로서 어떤 국가의 통치자는 전쟁의 고려와 시작에 있어 자의적이고 자유롭고 평등한 대우를 받고 있는 시민들의 생각과 입장을 고려하게 된다는 것이다.

 

칸트는 그가 활동하던 18세기 유럽의 전제군주정 하에서 군주 통치자들이 자신들을 평등한 시민이 아닌 국가의 소유자로 자처해 전쟁과 관련한 왕가의 이익을 중심적으로 고려해 이해하려고 했던 것이라 본다. 이와 더불어 칸트는 당시 웨스트팔리아강화조약(The Peace of Westphalia)[4]에 기초한 국제관계질서 속 많은 국가들이 국가주권의 원칙에 따라 독립적으로 공동체를 유지하며 연맹에 기초한 연방(federation)을 형성할 필요성을 주장했다.[5] 국가주권 원칙에 따라 독립적으로 공동체를 유지하고 경쟁하던 시대 상황을 고려한 것이다. 공화 헌법 국가들은 서로 연합할 때 국제사회 내 영구 평화가 가능하다는 의미였다. 칸트의 이러한 이론적 전제에 의하면 공화 헌법의 국가들은 평화를 애호할 수 있고 이러한 국가들이 연맹을 형성해 가맹국들을 늘려가며 세계는 점점 더 평화로워질 것이라는 논리를 피력했다. 또한 사해동포적 헌법(cosmopolitan constitution)의 사태를 통해 국제 문제에 대한 다른 국가의 인도주의적 개입의 이론적 기틀을 제공했다.

 

대표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 종결에 주도적 역할을 하며 국제연맹의 창설에 주도적 역할을 한 미국의 제28대 대통령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은 국제연맹 창설의 주도적 역할을 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수립된 유엔도 칸트의 평화구상을 국제정치 실제에 적용하려는 노력을 한 것으로 보인다. 유엔이 국제 평화의 유지와 관련해 보여주는 한계점은 유엔의 설립 과정을 통해 편의적 정치적 타협에 의한 자유국가들 혹은 공화주의 연맹이란 이론적 요소가 간과됐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칸트의 영구평화론은 자유민주주의적 정치이념과 상통한다. 칸트의 평화개념이 기초하는 공화헌법에는 자유와 평등을 핵심적 요소로 하며 그것의 보장이 선결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칸트가 이야기한 공화주의적 평화와 오늘날의 자유주의 평화론과 그리고 민주평화론의 핵심용어인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다양한 형태가 있을 수 있다.

 

자유주의 협력체제의 유럽 사례와 동북아시아의 사례

이에 전후 유럽은 독일의 전후질서 형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에 가입했다. 프랑스 외무장관이던 로베르 슈망은 프랑스와 독일의 석탄과 철강 산업 공동체 등을 먼저 제안했다. 군수물자인 석탄과 철강을 국제적 공동 관리함으로써 전쟁 근원을 제거해보자는 의도였다. 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를 통해 유럽은 평화경제를 이루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 정부는 동방 정책을 통한 유럽 전후 질서를 이끌었다. 빌리 브란트 정부는 서유럽 국가들과의 협력을 통해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노력했다. 지역질서의 성격을 변화시키면서 동서독 관계를 발전시킨다는 판단하에서였다. 빌리 브란트의 동방 정책은 소련과 모스크바의 조약을 채택하면서 폴란드를 비롯한 바르샤바 조약기구 소속 기구들과의 관계 개선, 소련과의 관계 개선을 우선적으로 추진했다. 빌리 브란트 정부는 닉슨의 세계적 데탕트를 추구하는 국제환경에서 지역적으로 소련 및 동유럽 국가와 관계 개선을 통해 동북 정책의 우호적 지역 질서를 만들어 나갈 수 있었다. 지역 질서는 동서독 관계가 가능한 대화와 협력의 중요한 배경이 됐다.

1980년대 후반부터 소련 대통령의 동북아시아 다자간 평화협력 구상이 시작됐다. 소련 대통령 고르바초프는 태평양 안보회의의 구축을 제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과 북한은 분단 상태였으며,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가 군사강국으로 대치중 이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한반도의 냉전적 상황은 지속되게 됐고, 협력과 더불어 군사적 대립도 함께 지속됐다. 동북아에서의 다자간 안보협력의 이행은 쉽지 않았다. 우선 동북아에서 안보협력 이행은 쉽지 않았고 우선적으로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4대 강국이 대치하고 있는 형상이었다. 유럽의 유럽안보협력기구, 중미의 중미통합체제, 동남아의 아세안지역안보포럼과 더불어 동북아의 협력 안보 수준은 매우 초보적이었다. 동남아의 아세안 지역안보 포럼에서의 동북아 협력 안보 수준은 매우 초보적인 수준이다. 세계적인 탈냉전 상황에서의 한반도 질서 또한 변화했다.

 

노태우 정부는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했으며, 유엔 동시가입,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성사시켰다. 또한 참여정부 당시 20059·19 공동성명과 20072·13 합의문이 한반도 평화체제를 위한 논의를 명시했으나 북한의 외교적 고립노선은 크게 개선되지 못했으며, 이의 노력은 참여국들의 소극적 이행으로 지지부진해지고 말았다.

 

이는 평화학의 창시자로 알려진 요한 갈퉁(Johan Galtung)소극적 평화’(Negative peace)와 적극적 평화(Positive Peace)의 분리에 있어 평화의 중요성을 확인 할 수 있다. 또한 적극적 평화는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차원에서 간접적, 구조적 폭력 요인이 사라진 동등한 관계를 의미하는데 이를 통해 북한 핵문제 혹은 군비축소의 소극적 평화개념을 넘어선 적극적 평화 개념을 달성 할 수 있다. 후자는 안보 레마를 감소시키고 관리하기 위한 안보 짐Security regime 관점에서 이해 될 수 있다. 갈퉁의 관점에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논의의 과정에서 평화의 개념은 대체로 영구적인 평화상태를 지향하는 적극적이고 안정된 평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남북간 분단과 냉전 갈등 구도의 북미간 적대체제를 포함해 한반도 냉전체제를 근본적으로 해체하는 수보단 일단 안보 딜레마를 감소하고 분쟁을 방지하기 위한 안보 레짐을 형성하는 소극적이고 불안정한 형태의 평화개념으로 옮겨가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평화 레짐의 개념을 이용해야만 한다.[6]

 

 대표적 개념으로는 국제인권규약(International Covenants on Human Rights)을 들 수 있다. ‘시민 및 정치적 권리(Civil and political rights)에 해당하는 것으로 시민 및 정치적 권리의 내용은 인간의 존엄성에 기초한 생명권, 자유와 안전권 그리고 이동 및 거주의 자유와 법 앞의 평등, 사상, 양심 및 종교의 자유와 표현 그리고 결사의 자유와 공무담임권 등을 포함한다. 또한 공화헌법이 개인의 자유와 평등권을 보장하며 이를 기초로 구축되어 있다고 볼 때 이러한 자유와 평등권은 개인들로 구성된 국가들 내부에 헌정 혹은 행정에 대한 간섭을 금지한다는 것이 인권 보호의 견지에서 논리상 어떤 모순이 될 수 없다.

 

또한 칸트의 국내문제 불간섭 원칙이 기초하는 시대적 맥락은 국제사회의 공동체 의식에 대한 약육강식의 상황에서 군주 등 통치자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일어났던 전쟁들이었다. 칸트는 유럽에 대해 전제 군주 하의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등 민주적 시민혁명의 와중에서 프랑스에 간섭하며 발생했던 문제들이었다. 인권 유린을 자행하던 국가들이 이웃국가들의 영토 및 정치적 독립을 유린하는 전쟁을 일으킨 역사적 맥락에 기초했다는 것이다.

 

남한의 정부 수립과 더불어 비슷한 시기인 19489월 북한은 김일성의 주도 하에 사회주의를 정치이념으로 하며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7]을 수립한다. 북한 김일성과 그 일당은 정부 수립 초기에 남한민주주의와는 다른 체제의 대조적 조선공산당과 노동당을 중심으로 일당 체제의 북한을 통치해왔다. 이러한 정치체제의 특징으로 생산 수단과 집단 소유 등을 통해 국가 배급의 맑스-리닌주의를 실천하려 했다.

 

이를 통해 유산계급 혹은 부르주아 위주의 무산계급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권을 우선적으로 보장하며 맑스가 주장한 것과 같이 인민들에게 생활의 기본 수단을 평등하게 배분하고 이를 통해 진정한 자유권의 행사를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해당 체제에 대해서 반대주장을 하는 이들은 반동 분자 혹은 자본가 계급으로 규정 후 정치범 수용소등에 보내 자유권을 유린했다. 자유와 인권은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에서만 허용하며 자본가 계급에선 무시했다.

 

김일성 정권은 통치과정을 통해 사회주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3대 세습의 전제왕조체제의 모습을 보여줬다. 칸트의 영구 평화론을 행사하기 위해서 장애물로 간주되며 인식되던 전제군주체제가 북한 사회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전제정에서의 군주들이 그러한 것과 같이 일반인 삶이 아닌 정권을 먼저하는 것이다.

 

이처럼 칸트가 18세기의 군주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북한의 통치 집단에서 인민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관심 없이 자의적 판단에 대한 무력이 사용되고 있음을 의미하게 된다. 북한 통치자들은 북한 주민들의 자유권과 시민 및 정치권리를 억압하고 있다. 경제 및 사회적 권리도 억압하고 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최근까지[8] 유엔 인권이사회(United Nations Human Rights Council)을 비롯해 주요 국제인권 감시단체들은 민간단체들에 대한 지속적 우려와 비판 대상으로 몰렸다. 외에도 북한은 최악의 언론 억압과 인권 유린, 사회권 및 정치권에 있어서의 빈번한 납치와 인권침해와 더불어 대량살상 무기 보유와 핵무기 개발과 장거리미사일 개발을 자위목적으로 가지며 핵확산 감지조약을 탈퇴해 국제평화정착을 위한 노력에 반하는 행동을 하고 있다. 이는 평화적인 국가 공동체 체제 운영에 매우 역설적인 행보다.

 

공화주의 또는 자유민주주의적 정치이념과 정치체제는 자유권과 평등권을 동시에 고려해야 하지만 경제 및 사회적 권리와 시민 및 정치적 권리를 통한 정치공동체를 운영하고 국가연맹을 형성해야 한다는 공화헌법에 기반한 정치공동체는 현재 북한과의 체제와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모습이다.

 

 

한반도 평화체제와 평화협력 지대 구축을 위해서

칸트의 공화주의와 자유민주주의적 정치이념을 위해서는 민주와 평화 개념을 통한 새롭고 의미 있는 변화의 행보를 보여야만 한다. 이를 통해 휴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바뀐다고 하더라도 칸트의 이야기처럼 일시적 휴전조약에 그치고 말 것이다.

 

남한을 포함한 국제사회는 인권 상황개선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야만 한다. 또한 협상을 통해 북한의 대량살상 무기 개발 노력이 궁극적으로 북한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임을 설득해야 한다. 이를 통해 한반도 평화체제와 동북아의 평화협력이 함께 이루어져 병행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관계를 모색해야만 한다. 한반도 평화는 평화정착을 우선적 목표에 두고 탈냉전과정과 연계하며 단계적인 평화체제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평화협정의 체결을 목표로 지향하고 남북한 군사적 신뢰구축에 대한 포괄적 관계 개선이 필요하다. 북핵과정 해결 과정을 통한 신뢰 구축으로서 평화관리의 제도화와 절차화가 필요하다. 종전선언을 이행하며 항구적 평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탈냉전적 동북아 다자간 안보협력과 평화번영을 위한 안보협력체제를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이를 통해 경제평화와 정치평화를 함께 이루고 개방화와 민주화를 이끌어 칸트적 민주평화론의 공화주의 구성국가적 동북아시아 평화체제를 열어 나가야만 한다. 소극적이고 불안정한 형태의 평화체제 개념이 아닌 현재 6자 회담의 합의문에 사용되는 평화레짐적 체제와 개념을 이용해야만 할 것이다

 

 

참고문헌

김연철. (2013). 동아시아 질서와 한반도 평화체제 전망. 『경제와사회』 , 12-35.

서보혁. (2012) "서평: 요한 갈퉁의 평화, 인권론." 통일과 평화』 185-196.

신욱희. (2006). 다변화된 2 차적 상징: 민주평화론과 동북아시아.

오영달. (2016). 남북한 정치체제와 인권 그리고 한반도 평화. 『사회과학연구』 27(2), 91-113.

황지환. (2009). 한반도평화체제 구상의 이상과 현실. 『평화연구』 17(1), 113-136.

황지환. (2010). 선군정치와 북한 군사부문의 변환전략. 『국제관계연구』 15(2), 105-134.



[1] 북한은 선군 평화론을 내세우며 미국의 핵 위협으로부터 한반도 평화를 보장한다는 하고 있다고 견지한다. 북한의 한반도에 핵을 끌어들인 것이 아니라 미국의 핵정책과 대북 적대시 정책에서 비롯됐다는 인식이 보여져 한반도의 평화는 북한이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 위협하고 있으며 북한이 선군정치를 통해 강성대국을 이룩함으로써 대미 억지력을 갖고 오직 전쟁을 막을 수 있는 힘으로 담보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황지환. (2010). 선군정치와 북한 군사부문의 변환전략. 국제관계연구, 15(2), 105-134.

[2] Immanuel Kant, “Perpetual Peace: A Philosophical Sketch," in Hans Reiss, ed., Kant: Political Writing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1), pp. 93-130

[3] 민주평화론은 민주주의 국가들 사이에서는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이론으로 세력균형 혹은 상호의존 국제제도등을 통해 전쟁을 방지하며 평화를 달성한다는 구조주의(structural)적인 접근법을 취하며 민주화를 통해 세계평화를 달성한다는 단위 수준 접근법을 취한다. 신욱희. (2006). 다변화된 2 차적 상징: 민주평화론과 동북아시아.

[4] 30년 전쟁을 종결하기 위해 1648년에 체결된 평화조약이다. 이 조약으로 신성 로마 제국에서 일어난 30년 전쟁과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종결되었다. 다수의 역사학자들은 상호 독립적인 주권국가가 자신의 의사만으로 외국과의 동맹 등 조약을 체결할 권리를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이 조약을 근대 국제법의 시작으로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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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과 북한, 한반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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