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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05 22:54

소란(Thorub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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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Thorubos)

 

 

안성준 (민주주의·정치사상 mastad90@gmail.com)

 

 

           꺼져라!” 누군가 강한 어투로 외치기 시작하자 한 사람 두 사람 비난 행렬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내려와!” “말 같지도 않은 소리 그만하고 당장 나와!” 비난이 점점 거세지자 단상 위에서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웅변가는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단상 아래로 도망치듯 내려왔다. 원래 웅변가의 계획은 웅장한 목소리와 간결한 논지로 단숨에 6,000 명의 동료 시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교묘하게 자신이 속해있는 부족에게 세금을 면제하는 정책을 제안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부족 이름이 거론되자 마자 피닉스(Pnyx) 언덕을 가득 채운 시민들은 웅변가의 의도를 단숨에 알아챘다는 듯 더이상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고 다수의 소란으로 인해 웅변가는 그 말 할 기회를 잃었다. 웅변가가 단상에서 완전히 멀어지고 나서야 소란은 멈추었고 의회는 재개되었다. 기원전 5세기 경 아테네 의회의 모습이다.

 

           이제 시선을 2016 11 4일의 서울로 돌려보자. 한 사람이 군청색 배경을 뒤로 단상에 올라와 카메라를 향해 입을 열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그리고 바로 다음 날인 11 5일 토요일, 단풍이 무르익고 사람들이 코트를 챙겨 입기 시작 할 무렵이었던 그 때, 광화문 광장에서는 노오란 촛불들이 기나긴 장관을 형성하고 있었다. “민주주의 지켜내자, 끝까지 싸우자!” 마이크를 쥔 사회자가 외치자 삼삼오오 신문지를 깔고 앉은 시민들은 촛불을 치켜 올리며 사회자의 외침을 따라했다. 도로를 막아버리고 지하철 역 마저 마비시켜 버린 이 소란은 장장 스무 번의 토요일과 1,500만 명 이상의 인파를 겪었다. 이 소란 또한 단상에 올라와 국민을 존경한다는 말로 대부분의 웅변을 시작했던 그 사람이 단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끝이 났다. 얼마전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우리는 두 사례를 관통하는 하나의 핵심적인 개념에 집중해 볼 필요가 있다. 바로소란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들은 소란을 일으켰고 그 결과 발언권을 쥐었던 자들은 물러났다.  시민들의 소란이 민주적 책임성 기제로 작용하여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무엇인가로부터 민주주의를 방어했다는 것이 바로 두 사례의 핵심이다. 따라서 두 사례를 통해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들의소란이 지니고 있는 상징성과 영향력을 짚어보고 현재 대한민국이 고대 아테네로부터 어떠한 교훈을 얻을 수 있는지 알아본다면 우리는민주적 소란에 대한 깊은 이해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촛불집회가 어떻게소란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재정의 될 수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고대 아테네인들은 의회에서 일어나는 위와 같은 소란을 쏘뤼보스(Thorubos)라 불렀다. 쏘뤼보스는소란’, ‘소동’, ‘시끄러움등을 뜻하는 헬라어로 아테네의 의회나 법정에서 발언자의 말에 반대하거나 듣기 싫다는 표현을 하는 청자들의 집단 반발 방법을 표현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쏘뤼보스는 세 가지 특징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먼저 쏘뤼보스는 투박한 소란이다. 이는 정제된 정치적 언어로 발언자를 비판하는 토론의 기재보다는 더 이상 듣기 싫다고 소리지르는 동네 아저씨의 불평에 가깝다. 두 번째로 쏘뤼보스는 비공식적 기재다. 쏘뤼보스는 공식적인 반대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단순히 그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소리지르는 행위이기에 이를 공식적으로 꼭 받아들여야 하는 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쏘뤼보스는 그 대상이 매우 다양하다. 시민들의 반발은 단지 거짓이나 위선에 대해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발언자의 언변이 어눌하거나 논리가 정연하지 않거나 실력이 부족한 경우에도 일어났다.

 

어쩌면 쏘뤼보스는 훌리건들의 행위를 표현하기에 더 적합한 단어일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렇게 운동경기장에서나 볼 법한 행위를 아테네는 의회 정치의 정당한 절차로 받아들인 이유는 무엇일까? 아테네의 시민들에게 쏘뤼보스는 능력없이 정치적 영향력만 행사하려는 자들이나 언변만 화려한 사기꾼들로 부터 직접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한 하나의 민주적 책임성 기재(democratic accountability mechanism)였다. 시민권을 지닌 모든 사람이 참여할 수 있었던 아테네의 의회는 매 번 대략 6,000명 정도의 시민들이 모여 의사결정을 했다. 몇몇 시민들이 의제를 제안하면 대부분의 나머지 시민들은 손을 드는 방식으로 찬반결정에 참여하는 방식이 사용되었다. 그렇다 보니 실질적으로 발언을 하고 정책을 제안할 수 있는 사람의 수는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어리석은 자들이나 나쁜 의도를 가진 전문 웅변가들이 의회의 단상을 완전히 장악해 버리는 상황을 대비하여 아테네 의회는 언제나 시민들의 이러한 집단 반발을 정당한 민주적 책임 기재로 인정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기재 안에는 아테네 시민들의 폴리스(polis)에 대한 강력한 주인의식, 그리고 동료 시민들에 대한 굳건한 신뢰가 내포되어있다.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는 다수에 의한 정치였다. 따라서 이들이 가장 경계했던 것은 다수가 핍박 당할 수 있는 독재(tyranny)와 과두정(oligarchy)으로의 이행이었다.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기관으로 작동해야 할 의회가 한 명, 혹은 소수의 웅변가들에 의해 좌우되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공식적인 법안뿐 아니라 시민들의 자발적이고 즉흥적인 판단에도 의지해야 했던 것이다. 나아가 시민 모두가 동등한 권리를 지닌 존재들이기에 그들의 표나 정책 제안 뿐 아니라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표현되는 모든 정치적 의사 표현이 곧 정치적 정당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리고 쏘뤼보스의 작동은 그러한 시민들의 표현에 담긴 정치적 판단이 정당하고 신뢰가능한 것이라는 아테네 공동체의 판단이 녹아들어 있었던 것이다.

 

일 년 전, 대한민국의 짙은 추위를 녹여준 종이컵 속 작은 촛불들의 향연을 우리는 이제 촛불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추억한다. 하지만 거창하게혁명이라 주어진 이름 이면에서 우리는 여전히 이 사건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한다. 과연 이 사건이 정말혁명이었을까? 그렇다면 어떠한혁명이었을까? ‘혁명이 아니라면 이 사건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혁명은 주로 초헌법적인 사태, 즉 기존의 사회를 구성하는 제도들을 완전히 뒤엎는 것을 의미한다. 프랑스 혁명은 왕정을 무너뜨렸고 미국의 혁명은 없던 국가를 세웠다. 반면 지난 겨울 대한민국 시민들은 초헌법적으로 기존의 제도를 뒤엎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헌법의 틀 내에서 초헌법적인 행위들을 규탄하고 기존의 질서를 회복했다. ‘혁명이라는 이름이 제공하는 미학적 가치나 감정적 격상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촛불혁명은 사실혁명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촛불을 자랑스러워 하는 것은 그것이 혁명이어서가 아니다. 그 이유는 촛불이 우리 시민들의 투박하지만 책임성 있는 주인의식을 보여주었기 때문이고 비공식적이지만 그 어떤 정치인의 말과 법안보다 강한 정치적 힘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며 부정의함, 부도덕함, 무능력함, 그리고 뻔뻔함으로 오염되어 가던 우리 민주주의를 자발적 시민의식을 통해 정화시키는 민주적 책임성의 기재로서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촛불혁명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정점을 보여주는 고귀한 소란이다.  다른 생각과 다른 모습들이 한 자리에 모여 각자의 목소리를 낼 때, 길을 막고 지하철 역을 마비시키면서 늦은 밤 까지 일대를 함성소리와 음악소리로 가득 채울 때,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스스로를 치유하였고 국민을 존경해 마지않던 어눌한 웅변가의 위선은 쓸쓸한 퇴장으로 끝이 났다. 이렇게 우리들의 빛났던 소란은 끝이 났다. 아테네 시민들은 의회에서의 쏘뤼보스가 끝난 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원래의 의회 절차를 이어 나갔다고 한다. 우리의 소란도 그러했다. 기나긴 소란의 끝에 다시 헌법의 가치에 따라 새로운웅변가가 단상에 올라갔고 그 또한 강력한 민주적 책임성 기재들의 시험대에 놓여있다. 혁명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아니면 어떠한가? 우리들의 소란이 흔들리던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제자리로 돌려놓았다면, 그리고 앞으로의 위협으로부터 이를 보호할 수 있다면, 소란 정도의 이름으로도 충분히 고귀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