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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은 기술이 "새로운 신체"에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신체"의 산출을 위해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고 본다. "새로운 신체"는 기술이 생산적으로 투입되면 비로소 가능하다. 이는 기술과 신체 또는 자연을 대립적인것으로 파악한 근대적 관점에 전면적으로 대항하는것이며, 벤야민의 기술 긍정적인 사상 전반에 관련한다. 주지하다시피, 벤야민은 당시 새로운 매체로 등장한 영화의 미래의 정치를 위한 진보적 의미를 부여했다.(14p)

현존하는 예술의 사회적 결정적인 기능은 이러한 합작을 훈련시키는데에 있다. 그것은 영화에서 통용된다.(...)영화는 그 역할일 인간의 삶에서 거의 날마다 점증하는 기구와의 교류가 조건지우는 그러한 통각들과 반작용들에대한 인간이 훈련되게끔 기여한다(Benjamin :VII 359-360)"

"자연과 인류의 합작"으로서의 기술이 예술과도 유사한다는 점은 예술과 기술을 동시에 듯하는 그리스어 테크네(techne)에서 이미 뚜렷이 드러난다. 나아가 기술은 벤야민이 말하는 시각적 무의식(Benjamin :I500)개념과도 관련을 맺는다.
카메라가 시각적,무의식적으로 기능하고 가시성의 장에서 인간의 맨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또록 해주듯, 기술 일반은 인간의 감각기관으로서 지각이 안되는것에 대한 접근이 가능하게해준다.

그러나 벤야민은 기술을 단순히 인체기관의 확장이란 의미로 파악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술은 인간의식내부의 급진적인 단절을 의미한다. 인간은 이제 기술적 기구의 도움으로 타자의 위치를 점유하게됐다.이제 인간은 세계를 타자의 지각기관으로 지각하고 그럼으로써 고유한 지각을 다양한 지각 방식들 중 하나로 상대화하게된다. 즉 인간은 이제 타자의 지위를 취하고자 자신의 고유한 세계상을 비판적으로 검증 할 수 있게끔 되었다.
 기술이 이러한 즉자로부터 대자로의 관점이동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같은 즉자로부터 대자로의 관점이동이야 말로 진리라고 할 수 있다.(Zizek 2006:36) 기술이야말로 진리의 장소를 뜻한다고 보는 것이 가능하다.
->벤야민은 기술을 통해 갑작스럽게 개체와 사회의 무의식이 현상으로 드러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는 그럼으로써 기술을 의식의 영역에서 영속시키는 기존의 기술관에반해 기술을 의식과 무의식,문화와 자연의 종합으로 파악한다. 그는 다른 글에서 기술을 "새로운 자연현상"으로 규정하기까지한다. "모든 참으로 새로운 자연현상에는-기술 또한 근본적으로 그런 자연형상이라 볼 수 있다.-새로운 '이미지들'에 대응한다."(Benjamin V: 493). (15p)

철학자 한스 요나스(Hans Jonas)는 인간의 고유성을 이미지를 제작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보며 인간을 '호모 픽토르'(homo pictor)라고 규정한다.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호모 피토르는 호모 파베르(homo Faber)와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가 결합되는 지점, 즉 그 두 가지가 동일한것으로 나타나는 그런 지점을 일컫는다."(Jonas : 122) 요나스가 말하는것처럼 이론적 인간과 실천적 인간은 구성을 통한 행위에서 동일하다. 이미지 제작자인 호모 픽토르는 내적이미지와 외적이미지 두 가지를 다 산출해내기 때문이다.

동물들은 자신의 존재방식에 대한 의식이 없이 무한한 열림 안에 그저 현상하는 반면 인간은 열린 공간 안에서 자신이 현상함 자체를 파악하는 능력을 갖는다. 그리고 인간은 이미지를 제작하는 유일한 존재다. 그것만이 인간의 표상의 능력을 지니므로 내적이미지와 외적이미지의 제작은 필수적으로 서로 관련을 맺기 때문이다. 나아가 익난은 "현상을 현상으로서"(Ibid :119)포착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다. 그러므로 인간만이 이미지를 제작하고 또한 이미지를 이미지로서 인식한다.

탈근대의 이론과는 반대로 벤야미느이 질문은 "어떻게(상상적인)시뮬라시옹을 통해 현실을 구성할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매체로서의)이미지와 기구를 통해 실재를 되찾을 것인가.?".
이는 탈근대이론의 구성주의(Konstrucktivismus)에 반대하는 사실주의(Realismus)의 회귀라 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이미지를 통해 상실된 세계를 되찾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벤야민은 어쩌면 다음과 같이 답변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세계와 우리 자신을 유일한 하나의 이미지의 일부로 파악하는 법을 배운다면, 우리는 세계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2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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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의 사유 思惟thought에 나타난 주체 主體 main agent, principal agent ,이미지image, imagery ,기술技術 technique 사이의 관계(the realtionship above all things connected to each other)


1.근대近代modern 와 탈근대postmodern를 넘어
정신精神 mind, spirit;soul 과 물질 주체物質materialism 와 객체 문화客體文化와 자연의 차이를 객관적objectively 客觀的으로 주어진 경계境界boundary가 아닌 역사적歷史的historic(al)  또는 문화적 履行이행cultural  performance  으로 이해한 탈근대의 경험이후experience of post modern experiencetransition, changeover, shift, (Am) switchover, transform, shift  인간의 개념conception of the human being,notion of human being 人間 槪念은 위기 危機 crisis (crises), emergency, critical situation 에 직면 直面 face (up to), confront, see a personface to face, be confronted by[with] 했다. 근대는 주체 主體 main agent, principal agent 를 부동不動unassailable.한 세계世界의 중심점central point 中心點)이자 인식認識 awareness, realization, cognition의 절대적 심급絶對的甚急 unconditional, absolute 으로 이해한 반면, 주체主體의 정체성은 더이상 자기 스스로에 의해 정립正立found, establish, set up 되지 않고 있으며 단지 타자他者another one에 대한 경계警戒 ] guard, alert, (formal) vigilance  지음에의해 사후적postcontrol事後으로 구성構成] composition, constitution, organization, formation될뿐이라고 주장한다. 후자 後者 the latter 에 의하면 자아는 부정(타자)의 부정의 산물産物일 뿐이다. 그러므로 자아가 타자를 정립한다는 근대의 가정은 타자가 먼저 부정으로 정립正立correct, right 되고 나서야 자아가 부정의 부정으로서 생성된다는 탈근대의 전제에서 완연히 부정된다. 그러므로 주체는 더 이상 정립correct이라는 것은 아니라 정립be founded된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탈근대의 담론을 비판적으로 극복하고, 출발점을 삼는 동시대의 사유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로 떠오르는 문제는 변증법적 과정dialectically 辨證法的) 過程 process 을 넘어 주체主體main agent, principal agent 를 사유事由 reason/grounds 하는것이 가능한가. 즉 주체를 긍정적肯定的인것으로 사유하는것이 가능한다. 하는 것이 문제다. 주체는 단지 (역사적,사회적,문화적으로)생성生成creation, formation, be created 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세계를 창출 創出 해내고 변화 變化 시키는 창조적 심급甚急creative instance일 수 있는가.

본 논문은 이상과같은 탈근대의 주체가 직면한 핵심적 문제들에 대한 답변 할 수 있는 한 가지 가능성을 발터 벤야민의 인간과 기술에 대한 성찰에서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벤야민은 근대의 주체관과 탈근대의 주체적 양자를 비판적으로 넘어서는 대안적 주체관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주체는 더 이상 근대적인 의미에서도 정립도 탈근대적인 것의 의미에서도 정립된것이 아니라 정립의 해체 (Ensetzung Benjamin : II 202)이다. 이러한 벤야민의 주체 개념은 이미지와 기술 또는 매체에 대한 인간의 공생 共生 symbiotic relationship 共生關係을 가능케하는 우리 시대가 전적으로 요구하는 새로운 기술 개념을 제시해준다. 그러므로 본 논문은 벤야민의 사유에 나타난 주체,이미지,기술 사이의 관계 에대한 연구를 통해 우리 시대가 필요로 하는 새로운 주체 개념을 모색해야 한다.


2.이미지와 공간의 주체
벤야민은 미완未完incomplete으로 남은 후기의 역작 (아케이드 프로젝트_Das Passagen Werk)에서 내부와 외부 인테리어(Interior) 사건(Ereignis)간의 대립을 지양하고자 시도한다 .그는 여기에서 역사적인 사건이 내부의 구성에서 결코 대립對立 opposition (between), conflict, confrontation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한다. 아케이드 안에서 외부는 내부로 내부는 외부로 변형變形  modify,transform되며 결국 둘 사이의 경계는 모호模糊ambiguous, vague (about), (formal) equivocal, uncertain, obscure, imprecise 해진다. 그래서 내부와 외부intrinsic-extrinsic 內部-外部를 분명히 구분하는 것은 더이상 불가능하다. 벤야민은 이같은 이분법 二分法 dichotomy 의 무력화無力化incapacitation, neutralization 를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론methodology 方法論을 초현실주의 超現實主義 surrealism 에 대한 연구를 통해 획득獲得 acquisition한다. 벤야민의 초현실주의에 대한 에세이가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선행작업pre-task 先行作業으로서의 결정적 決定的 decisive, crucial, definite, conclusive  역할 役割 role, part 을 한다는 점은 이미 벤야민의 연구가들에 의한 연구가들에 강조된 바 있다. 그러므로 미지공간 bildream,신체공간Leibraum등 초현실주의surrealism  超現實主義 에세이등 심의 upon the table審議개념들은 특별히 주목해야한다.

이미지공간은 신체공간과 상호침투interpenetratio相互浸透하며 이미지와 인간 주체의 구분區分이 불가능不可能impossible 해진다는 공간이다. 즉 그서은 주체의 철저한 제거가 발생하는 공간이다. 이미지 공간 안에서 주체적 한 이미지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이를테면 영화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인물들이 등장하는 영화의 한 장면 속에서 그들은 실존하는 인물들이라기보다는 장면 속의 이미지들일 뿐이다. 그러나 영화뿐만 아니라 현실속에서도 장면 속의 이미지들일 뿐이다. 육체적fleshl으로 실존 實存existence, exist 하는 인간을 이미지로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다른 무엇이 어딘가에 앞서 가시적인 visible可視的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초현실주의에 관한 에세이 이미지공간이 집단의 주체적 주체와 구분 불가능하게되는것에대한 과정에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모든 혁명의 긴장이 신체적인 집단적 신경 감응으로 집단의 모든 신체적인 신경감응이 혁명적 분출로 될 정도로 신체Leib)  미지공간이 세속적인 깨달음에서 서로 깊이 침투浸透pass[get] through, permeate할때만이 실제(Wirklichkeit)는 공산주의선언이 요구하는것처럼 스스로 훨씬 능가한다.(Benjamin II 310)  p4

여기에서 묘사된 신체와 이미지공간의 상호침투는 물질적 하부구조物質的 下部構造material  substructu reorganization 와 정신적 상부구조간psychological, mental superstructure 精神的 上部構造의 상호작용interaction相互作用 에 상응相應 correspondence, response, respondence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호침투interpenetration 는 벤야민에 따르면 세속적 깨달음(profane Ereuchrung)에 의해서 가능해진다. 세속적 世俗的 worldly, secular 인 깨달음에서는 이처럼 가까움 가능해지나.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분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그곳에는 단지 상호작용interaction 相互作用 이 교류가 있을 뿐이다. 세속적 깨달음은 따라서 경계가 아닌 유일무이한 문턱Schwelle)의 경험이며 그것을 통해 정신과 물질간의 전이轉移metastasis, spread, metastasize 가 끊임없이 이루어진다. 벤야민은 세속적世俗的worldly, secular 깨달음은 유물론적 인류학적anthropological  영감靈感 inspirationBenjamin II 207 이라고 서술한다. 따라서 세속적 깨달음은 유물론적 개념,즉 관념론 철학,특히 셸링의 선험적 관조에 대항하는 반대개념으로서 파악되어야 한다.

이처럼 이미지 공간에서는 주체와 객체간의 거리가 지양되는데, 그것은 거기에서 주체가 이미지 속으로 들어가 그 일부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주목할만한 점은 벤야민이 이미지와의 관찰자와의 통합이나 관조가 아닌 실천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본다는 점이다. 벤야민은 다음과같이 말한다.

"염세주의를 조작한다는 것은 바로 정치에 도덕적 은유를 제거하고 정치적 행위의 공간에 백퍼센트 이미지 공간을 발견하는것에 다름아닌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공간은 관조적으로 전혀 측량할 수가 없다.(Benjamin :II309)" 5p

벤야민에 의하면 이미지 공간을 창출시키는것은 행위handeln이다. 따라서 이미지공간은 행위와 필수적 관련을 맺는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이미지의 행위다.

"한 행위가 이미지를 자신으로부터 불러내고 이미지이기도 하며, 이미지를 자신 안으로 끌어넣고 또한 이미지를 먹어치우는 것, 가까움이 스스로를 자기눈으로 바라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얻고자 하는 이미지 공간,즉 전면적이고 완전한 현실성reality, practicality 의 세계가 나타난다.(lbid)

벤야민은 여기에서 이미지공간,신체공간,행위공간,즉 이미지,주체.실천간의 필수적 관계에 대해서 서술한다.이미지 공간, 신체공간,행위공간,즉 이미지,주체 실천 간의 필수적인 관계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인간 주체를 필수적으로 전제하지 않는다. 행위는 여기에서 가까움과 멂,주체와 객체의 대립을 해소시킨다. 그럼으로써 거리가 사라지고 스스로를 자기 눈으로 바라보는 대립을 해소시킨다.

그럼으로써 거리가 사라지고 거리가 사라지고 스스로를 자기눈으로 바라보는 완전한 가까움에 군림 君臨  reign over하게된다. 그곳에서는 관찰자observer와 관찰대상자觀察對象者가 상호융합相互融合하며, 나아가 실제로 사물의 외부에 존재하는 관찰자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곳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은 객체-시선과 하나가된 사물이다.

이 사물은 언제나 이미밖에 있기 때문에 바깥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객체-시선은 주체와 자리에 의존하는 제한된 시점이 아니다. 이와는 반대로 그것은 어떤 제한도 경계도 알지 못한다. 자아와 물러나고 그 대신에 우리가 어떤 것으로 등장할때 더이상 내부와 외부 주체와 객체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주체로서의 자아만이 스스로를 구성하기 위해 경계를  세우기 때문이다.

이미지 는 벤야민에게 물질도 정신도아닌 양자의 사이에 존재하는 "제삼자". 벤야민은 이미지에서는 두 가지가 그 안에서 다른 것으로 변해버렸다. (Benjamin IV 284)라고 말한다. 만약 이미지가 순수한 물질이라면은 그것은 실재의 변형을 불러 일으킬 능력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움직이지 않는 죽은 재료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지가 욕망이미지 또는 꿈이미지라면 그 안에서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처음부터 해체되어 있기 때문에 실제적인 변형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것은 단지 움직이지 않은 죽은 재료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지가 욕망이미지 혹은 또는 꿈이미지라면 그안에서는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처음 해체되어 있기 때문에 현실의 실제적인 변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가능할것이다. 꿈과 현실 두 가지를 무한히 제조해내는 그러한 재료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무한한 생산의 가능성으로서의 이미지는 내부와 외부의 교차지점intersection point 을 형성한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역사의 비판적 순간들을 시험대에 올리는 혁명적 실천의 진원지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역사의 비판적 순간들을 시험대에 올리는 혁명적 실천의 진원지다. 벤야민은 이로써 이미지의 미학과는 구분되는 실천의 진원지다.

벤야민은 이로써 이미지의 미학과는 구분되는 이미지의 정치를 구상한다.벤야민은 이로써 이미지의 미학과 구분되는 이미지의 정치를 구상한다. 그의 이미지는 실천의 이미지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미지들의 실천들이다. 그것은 미학이나 근대철학의 의식담론으로 환원가능한 실천의 차원을 포함한다.

벤야민의 실천개념은 주체의 실천을 능가하되 그럼에도 주체의 실천과 밀접한 상호적 관련을 맺고 있는 그런 변증법적 이미지 dialekticsches Bild의 실천을 뜻한다. 달리말하자면 벤야민에게 있어서 주체의 실천은 그것이 이미지의 실천으로 나타나는 한에서 핵심의 의미를 부여 받는다. 그러므로 벤야민의 사유에서 실천은 자발성自發性spontaneity, spontaneousness 일뿐만 아니라 수동성이기도하며 주체는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자 일뿐만 아니라 수도억으로 관찰되는 자이기도하다.

마르크스 또한 실천을 주제의 일방적 자발성이 아닌 정신과 물질간의 매채게로 사유한 바 있다. 그는 <포이어바하에 대한 테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포이어 바하를 포함하여) 지금까지의 유물론의 주된 문제는 대상,감각을 객체나 관조觀照contemplation, meditation, observation,의 형식하에서만 고찰考察  consideration, contemplation해왔을뿐 감각적인 한 인간의 활동이나, 실천으로서의 비주체적으로 고찰하지는 않았다는 것으로 점이다.

베르크(Berg)는 마르크스와벤야민 양자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실천과 객관 관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8p


"인간의 실천을 출발점으로 삼으면서 내부세계와 외부세계의 분리는 극복된다. 인간은 자신의 실천 안에서 그의 외부에 놓여 있는 세계에 대해 관련을 맺는것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능력으로써 변형시키는 그러한 세계의 일부다그리고 이 세계는 그에게 자연의 사건도 사유도 산물도 아닌 사회적 관계이다.(Berg : 13-14)

그럼에도 벤야민의 유물론은 마르크시즘과 구분되는데 이는 벤야민에게 있어서 체제와 과정의 역할(Benjamin : V 1027)이 핵심적이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단순한 물질과 정신,하부구조와 상부구조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체화와 과정과 현상을 강조한다.따라서 벤야민의 유물론은 물질의 존재에대한 이론이 아닌 물질의 생성에관한 이론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기존의 유물론과 구분되는 선험적 유물론과 구분되는 선험적 유물론(transzendentaler Materialismus)라고 볼 수 있다. 변증법적 이미지는 기존에 존재하지는 이미지가 아닌 새로운 이미지가 그 체화의 과정 속에서 포착 捕捉 catch, capture 된것이다.이러한 체화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은 새로운 것의 생성이자 기존의 것의 변형이다.벤야민은 이러한 의미에서 변증법적 이미지에서 사회적 변형을 위한 결정적 의미를 부여한다. 9p

변증법적 이미지
변증법적 이미지는 벤야민 후기 사상의 인식론적 핵심을 이루는 개념이다. 그것은 충격으로인해서 비로소 나타나는 우리에게 불현듯 다가와 마주치는 이미지다.베냥민은 변증법적 이미지는 곧 정치상태의 반증법이라고 말한다.그 안에서 지나간것이 현재적인 것과 함께 섬광처럼 하나의 형세(Konstellation)을 이룬다."(Ibid)

"모든 지금(jetzt)는 어떤 특정한 인식가능성의 지금이다. 거기에서는 시간과 함께 진리가 파열 직전까지 꽉 차 있다.(다른 어떤 것도 아니라 이러한 파열이야말로 진정한 역사적 시간 즉 진리의 시간과 탄생과 일치하는 의도와 죽음이다.)지나간것이 현재적인것에 자신의 불빛을 비추거나 현재적인 것이 지나간것에 자신의 불빛을 비추는게 아니라 이미지에서 지나간것이 현재적인것처럼 성광과 하나의 형세를 이룬다.

달리말하면 이미지는 정지상태의 변증법이다. 왜냐하면 현재와 과거의 관게는 순전히 시간적인 관계인 반면 지나간것과 지금의 관계는 변증법적인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간적 속성이 아닌 이미지적 속성을 지닌다. 변증법적 이미지들만이 태고적인 이미즏ㄹ이 안니 진정으로 역사적인 이미지들이다. 독해된 이미지,말하자면 인식가능성의 지금의 이미지는 모든 독서의 근간을 이루는 최고의 비판적이고도 위험한 순간의 낙인이 찍혀있다. (Bidd) 10p

그렇다면 "정지상태의 변증법"으로서의 이미지를 어떻게 이해햐아 하는 것인가.? 이하는 위의 인용문에서 서술된 변증법적 이미지의 포괄적 의미를 정리해야 한다.

 첫째, 변증법적 이미지는 벤야민에게 있어서 다른 무엇이기에 앞서 역사적 범주다. 그래서 벤야민은 변증법적 이미지를특히 태고적 이미지 (arcaisches Bild)에 대립시킨다. 그러나 벤야민의 역사개념은 역사주의자들이해하는 역사개념과 완전히 다르다

역사주의는 역사의 연속성을 전제하고 현재와 과거의 관계를 "순전히 시각적인"관계라고 파악하는 반면, 벤야민은 지나간것과 지금 사이의 변증법적인 이미지가 있고 이미지적인 불연속적 관계가 있을 뿐이라고 파악한다. 그에 의하면 지나간것도 지금도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단지 이미지 안에서 순간적으로 하나의 형세를 이루게 될 뿐이란 것이다.

둘째, 변증법적 이미지는 진리와 연관된다. 이는 새로운 의미의 맥락의 창출 創出 이 진리의 기호 아래 진행되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에서 수행된은 진리의 행위는 인간 이성의 제한된 영역을 훨씬 넘어선다. 진리는 바로 "의도의 죽음"이며, 그 자체 인식의 저편에 있다. 그것이 그럼에도 "인식가능성"이라고 불리는 까닭은 그 스스로는 인식의 외부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식을 비로소 가능하게해주는 가능성으로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리는 사물을 어떤 특정한 독해가능성에로의 그리고 우리 인간을 인식에로 도달하게해주는 능력(Potenz). 그러므로 변증법적 이미지는 이분법이 사라지고 진리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그러한 양태다.


셋째, 변증법적 이미지는 독해가능성 도는 인식가능성과 밀접히 관련한다. "읽혀진 이미지" "인식가능성의 지금의 이미지"는 매번 다르게 읽혀질 수 있는 이미지다. 그것은 '다를 수 있음'(Anders Sein Konnen)의 이미지다변증법적 이미지와는 다른, 태고적 이미지는 특정 의도에의한 일의적 확정된 독해가능성에 관련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지금이 변증법적 이미지에게 자신의 독해 가능성을 준다. 그러므로 독해가능성의 독해의 자유와 한계 두 가지를 동시에 내포하는 개념이다.

넷째, 벤야민은 인식가능성의 지금을 "지금시간"(Jetztzeit)라고 지칭 한다. 따라서 변증법적 이미지는 "지금 시간" 에 대해서 필수적인 관련을 맺고 있다. 인식가능성의 짖금은 예측불가능한 충격적 순간이다. 그래서 그것은 우리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이기도하다. 바로 그러한 순간에 뜻하지않은 이미지가 나타나 우리가 해독가능하도록 스스로를 제공한다. 이러한 순간의 폭력이 이미지의 진릭의 척도다. 변증법적 이미지는 오로지 폭력의 충격을 겪은 자에게만 스스로를 독해 가능한 대상으로 제공한다.

다섯째, 변증법적 이미지는 주체의 수용력과 개방성과 필수적으로 관련한다. 이에 의하면 더 이상 객체에 대립하는 세계의 중심이자 세계 구성의 원동체가 아니라 메시아적 사건의 매체다. 그러나 변증법적 이미지는 일방적으로 수용력만을 요구하지 않고 일정한 결연함도 요구한다. 따라서 주체는 수동적受動的passive 이고 수용적일뿐만 아니라 때가 되면 행동할 준비도 되어 있어야 한다.

벤야민의 주체는 이로써 수동성과 적극적 삶, 관조적 삶Vita Contemplativa와 활동적 삶Vita Activa 이론과 실천의 간격을 극복한다. 그러나 이러한 간격이 극복되는 것은 주체의 의도적 행위를 통해서라기보다 변증법적 이미지를 통해서다.변증법적 이미지는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지배하는 이분법의 자양이다. 그것은 표상,즉 정신적 이미지가 아니라 갑자기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의 표상에 폭력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실재적 사건이다. 우리는 그러한 변증버적이미지를 통해 실재적 사건의 리듬 속에 사건과 발맞추어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12p)


4.기술과 신체
벤야민은 <초현실주의> 에세이에서 이미지 공간안에서는 "쩡치적 유물론과 물질적 피조물이 내적인가,심리,개인 도는 우리가 비난하고자하는 어떤 것이든지를 변증법적 정의에의해 성하게남아나는 관절이 하나도 없을 만틈 샅샅이 분해한다.(Benjamin :II 309)라고 말한다. 그는 녕기에서 인간의 주체의 해체가 "성하게 남아나는 관절이 하나도 없을 만큼 과도하게 진행된 상황을 서술한다. 그러나 벤야민의 사유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인간의 주체는 해체가 종국에는 신체에 대한 새로운 관계를 가능하게 한다고 본다. 벤야민이 인간 주체의 완전한 해체 이후에도 도달 가능하다고 보는것이 바로 "새로운 신체"(neus Leib)이다.그는 에세이집 <일방 통행로>의 마지막작품인 <천문관으로>에서 "새로운 신체"의 개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적는다. (13p)

"간질병자의 행복과 맞먹는 어떤 느낌이 지난 전쟁의 파괴의 밤들에 이뉼의 사지의 구조를 뒤흔들어 놓았다. 그에 뒤이은 폭동들은 새로운 신체를 제어하고자 한 최초의 시도였다. 프롤레타리아의 권력은 그의 회복에 대한 척도이다. (Benjamin :IV 148)"

벤야민은 기술이 "새로운 신체"에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신체"의 산출을 위해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고 본다. "새로운 신체"는 기술이 생산적으로 투입되면 비로소 가능하다. 이는 기술과 신체 또는 자연을 대립적인것으로 파악한 근대적 관점에 전면적으로 대항하는것이며, 벤야민의 기술긍정적인 사상 전반에 관련한다. 주지하다시피, 벤야민은 당시 새로운 매체로 등장한 영화의 미래의 정치를 위한 진보적 의미를 부여했다.

이는 특히 아도르노의 보수적 문화비판적 입장에 대립하는 벤야민의 진보성이 잘 드러나는 측면이다. 아도르노는 영화를 문화산업의 선두주자라고 부정으로 파악하지만 벤야민은 영화가 인간의 지각 방식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놓음으로써, 새로운 시대의 정치를 여는데 크게 기여할것이라 전망했다. 벤야민은 상기한 에세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데 "그러므로 기술 또한 자연지배가 아닌 자연과 이뉴의 관계의 지배다. "(Benjamin :IV 146)

벤야민은 여기에서 기술이 더이상 자연의 반대 또는 타자를 뜻하지않고 오히려 자연과 인류의 관계를 정립시킨다고 밝혔다. 즉 기술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가능하게만드는 매체다. 따라서 기술은 단순히 기술적이기만한 차원을 넘어 전대미문의 사건들을 불러일으키고 물질성의 변형을 초래하는 창조적이고 시적인 기관이다. 그렇다면 더이상 자연의 지배가 아닌 기술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벤야민은 <기술시대의 예술작품>의 두 번쨰 판본을 통해 그러한 기술은 "자연과 인류의 합작"(Zusammenspiel)을 지향한다고 말한다. (14p)

"현존하는 예술의 사회적 결정적인 기능은 이러한 합작을 훈련시키는데에 있다. 그것은 영화에서 통용된다.(...)영화는 그 역할일 인간의 삶에서 거의 날마다 점증하는 기구와의 교류가 조건지우는 그러한 통각들과 반작용들에대한 인간이 훈련되게끔 기여한다(Benjamin :VII 359-360)"

"자연과 인류의 합작"으로서의 기술이 예술과도 유사한다는 점은 예술과 기술을 동시에 듯하는 그리스어 테크네(techne)에서 이미 뚜렷이 드러난다. 나아가 기술은 벤야민이 말하는 시각적 무의식(Benjamin :I500)개념과도 관련을 맺는다.

카메라가 시각적,무의식적으로 기능하고 가시성의 장에서 인간의 맨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또록 해주듯, 기술 일반은 인간의 감각기관으로서 지각이 안되는것에 대한 접근이 가능하게해준다. 그러나 벤야민은 기술을 단순히 인체기관physical organs 의 확장이란 의미로 파악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술은 인간의식내부의 급진적인 단절을 의미한다. 인간은 이제 기술적 기구의 도움으로 타자의 위치를 점유하게됐다.

이제 인간은 세계를 타자의 지각기관으로 지각하고 그럼으로써 고유한 지각을 다양한 지각 방식들 중 하나로 상대화하게된다. 즉 인간은 이제 타자의 지위를 취하고자 자신의 고유한 세계상을 비판적으로 검증 할 수 있게끔 되었다. 기술이 이러한 즉자로부터 대자로의 관점이동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같은 즉자로부터 대자로의 관점이동이야 말로 진리라고 할 수 있다.(Zizek 2006:36) 기술이야말로 진리의 장소를 뜻한다고 보는 것이 가능하다. 벤야민은 기술을 통해 갑작스럽게 개체와 사회의 무의식이 현상으로 드러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는 그럼으로써 기술을 의식의 영역에서 영속시키는 기존의 기술관에반해 기술을 의식과 무의식,문화와 자연의 종합으로 파악한다. 그는 다른 글에서 기술을 "새로운 자연현상"으로 규정하기까지한다.

"모든 참으로 새로운 자연현상에는-기술 또한 근본적으로 그런 자연형상이라 볼 수 있다.-새로운 '이미지들'에 대응한다."(Benjamin V: 493). (15p)

벤야민은 궁극적으로 "기술은 자신의 기관을 만들 수 있는"(Benjamin III238)사회 현실에 대해서 구상한다. 그는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위한 메모에서 "제이의 자연의 유토피아"뿐만 아니라 "제일의 자연의 유토피"도 있다고 적은바 있다. (Benjamin VII 665) 여기에서 제일의 자연이 뜻하는게 다름 아닌 기술이다. 이로써 벤야민은 자신이 추구하는것이 최종적으로 단순한 자연의 유토피의 기술적 유토피아도 아닌 기술과 자연의 유토피아라는 점을 밝힌다.

그는 그럼으로써 인간과 자연간의 분리 뿐만 아니라 인간 신체와 기술간의 분리 또한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 따르면 "집단적 신체"에는 기술과 자연의 통합이 실현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집단적 신체"는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나타내는가. 벤야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종으소의 인간은 천년 이래로 그 말전에 종말에 처한다. 그러나 종으서의 인류는 그 시작에 처한다. 인류에게는 그 안에서 우주와의 교류가 새롭고 민족들이나 가족들과 다르게 형성되는 그런 신체가 기술 안에서 스스로 구성된다.(Benjamin IV 147). (16p)

벤야민은 여기에서 자연과 기술의 구분 만이 아니라 가족과 국적의 장벽까지 넘어서는 범우주적 인류의 개념을개진시킨다. 이러한 범우주적인 인류개념은 글로벌한 세계의 시민을 요구하는 우리시대의 요청에 부합하는 진취적인 개념이며, 그것의 구체적 실현에 우리의 미래가 달려있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기술과 인간의 관계에 관련한 벤야민의 급진성은 나아가 그가 주체와 객체와 정신과 물질 문화와 자연과 경계만을 해체하는것이 아닌 인간과 기계 또는 기구apprant 간의 경계마저 해체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기계적인것 또는 기구적인것은 인간의 해체에 최종점을 이룬다. 생명과 비생명의 차이가 해체되면 인간은 자신의 생존에 무관심한 존재로서 나타난다

. 이것이 비개체화Principle of individuation/individuation of totality 個體 절정peak, (formal) zenith, the height[acme] of 絶頂이다.

기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성찰은 나아가 자유개념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제시한다. 벤야민이 가정하는것처럼 인간이 기구와 동일하게되어버린다면 인간은 자유와 어떤 관련을 맺을것인가. 인간은 단순한 자동기계로 전락한 부자유하고 모든면에서미리 결정된 일종의 대상에 불과한것인가. 그러나 벤야민이 구상하는 인간의 개념은 자유를 상실한 자동기계가 아니다. 그는 기구 개념을 인간의 반대로서 파악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주체와 객체와 정신과 물질 인간과 기계뜽의 이분법적인 논리를 넘어서서 중립적 지점으로파악한다. 그는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다음과같이 말한다. (17 p)

"기구는 영화촬영장에서 실제의 순수한,기구라는 이물질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국면이 특별한 과정, 즉 특별히 조절한 사진기를 이용한 녹화와 그것을 동일한 종류의 다른 녹화들과 함께 편집시키는 과정의 결과물일 만큼실제 속으로 깊숙이 침투한다. 그래서 오늘날의 인간에게는 현시르이 영화적 서술이 현실 자체와는 비교 할 수도 없을 만큼 더 의미가 크다. 현실의 영화적 서술은 오늘날의 인간이 예술작품에서 당연히 요구할 권리가 있는 ,실제의 비도구적 국면의 바로 그것의 기구와의 집중적 침투를 통해 보장하기 때문이다. (Benjamin I 458-459)

여기에서 기구는 "실제의 비도구적 국면"을 서술하기위해 필연적인 단계로 나타난다. 달리말해 기구는 그 안에서 실제가 스스로를 표현하는 그런 매체인 것이다. 여기에서 기구 개념은 실제의 현상을 위한 전존재론적 모체로서 작용하는 중립적 매체로서 나타난다. 중립적인 것에 대한 추구는 벤야민의 인식론을 초기에서부터 지배해온 기본적 경향이다.

벤야민은 초기작인 <도래하는 철학의 프로그램>에서 다음과같이 말한다." 인식을 위한 객체와 주체에 관한 완전한 중립( Neutralitat)의 영역을 찾는 것. 그것이 도래하는 철학의 과제다. (Benjamin II 163).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벤야민은 낭문주의적로 채색된 그의 초기사상에 나타난바 있는, 중립적인 매체를 통한 이분법의 극복추구를 기술에 대한 성찰을 통해 구체화 시킨다. (18p)


5.실재와 이미지
벤야민의 기구 개념은 무엇보다도 보드리야르가 주창한 시뮬라시옹의 개념과 구분된다. 프랑스 철학자 보드리야르는 <상징적 교환과 죽음>에서 시뮬라시옹이 현실의 소멸과 "극현실주의"(Hyperrealismus)의 도래를 초래한다는 도발적 주장을 펼친 바 있다.

극현실주의에서 현실은 몰락한다. 주로 광고,사진 등의 다른 복제매체를 기반으로하는 실재의 완벽한 이중화 속에서 실재는 매체에서 매체로 사라진다."(Baudrillard : 113-114) 시뮬라시옹 개념은 시뮬라시옹 바깥에는 더이상 실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 실재는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복제될 수 있는것"(오리지널)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언제나 이미 복제되어 있는 것"(시뮬라시옹)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Ibid : 116).이처럼 보드리야르가 대변하는 전형적인 탈근대적 사유는 세계상실과 세계회의의 결과물이다. 그 안에서 상실되는것은 세계에 대한 신뢰 그 자체다. 그 안에서 상실되는건 비단 세계에 대한 믿음 뿐만 아니라 인간의 고유한 능력을 구성하는 이미지에 대한 믿음이기도 하다.

철학자 한스 요나스(Hans Jonas)는 인간의 고유성을 이미지를 제작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보며 인간을 '호모 픽토르'(homo pictor)라고 규정한다.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호모 피토르는 호모 파베르(homo Faber)와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가 결합되는 지점, 즉 그 두 가지가 동일한것으로 나타나는 그런 지점을 일컫는다."(Jonas : 122)

요나스가 말하는것처럼 이론적 인간과 실천적 인간은 구성을 통한 행위에서 동일하다. 이미지 제작자인 호모 픽토르는 내적이미지와 외적이미지 두 가지를 다 산출해내기 때문이다.

동물들은 자신의 존재방식에 대한 의식이 없이 무한한 열림 안에 그저 현상하는 반면 인간은 열린 공간 안에서 자신이 현상함 자체를 파악하는 능력을 갖는다. 그리고 인간은 이미지를 제작하는 유일한 존재다. 그것만이 인간의 표상의 능력을 지니므로 내적이미지와 외적이미지의 제작은 필수적으로 서로 관련을 맺기 때문이다. 나아가 익난은 "현상을 현상으로서"(Ibid :119)포착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다. 그러므로 인간만이 이미지를 제작하고 또한 이미지를 이미지로서 인식한다.(19p)

이미지 제작 능력은 우선 분리를 전제한다. 주체는 세계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와 거리를 취하고서 "거리를 둔 조망의 자유"(Ibid)를 획득한다. 그러나 이미지 제작은 일방적으로 주체성하고만 관련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현상을 현상으로서 인식할 뿐만 아니라 제작하기도 함으로써 현상의 양태로 다시 내부와 외부,주체와 객체라 서로 간계를 맺을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미지 제작의 능력이 없다면 조망의 자유와 새로운 이미지 산출의 자유 양자를 다 상실할 것이다. 인간은 분리를 통해 이론의 자유를 얻지만 자신의 실천을 통해 주체와 객체 간의 상실된 연결고리를 다시 재생시키기도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이미지 제작을 통해서 상상력(내적 이미지 산출)과 객관적 세계의 제작(외적 이미지 산출)이라는 이중의 의미에서 정신과 자연, 이론과 실천의 이분법적 구분을 극복한다. (20p)

이상에서 살펴본바와같이 벤야민의 기구개념은 실재 개념을 처음부터 부정하는 탈근대의 시뮬라시오 이론과는 달리 실재에 대한 신뢰에 기반한다. 시뮬라시옹은 라캉의 이론에 등장하는 상징계,상상계,실재계의 구분에서 상상계에 해당한다.(zizek:2001:269).

상상계는 라캉에게서 이미지의 영역을 의미하고 상징계는 언어의 영억,실재계는 언어화되지 않은 잔여,의미의 질서에서 배제된 영역을 뜻한다. 시뮬라시옹은 상상계와 실재계, 즉 이미지와 실재를 구분불가능하게 만든다. 여기에서 실재 개념은 위기에 처한다.실재는 이미지로써 구성된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벤야민은 기구가 실재를 비로소 현상하게 해주는 매체라고 파악함으로써 실재 개념을 논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실재는 매체를 토안 현상 이전 자립으로서의 존재라는 실체가 아니라 "기구와의 집중적인 침투를 통해"비로소 현상하는것이다. 그러므로 실재는 기구를 통해 현상함으로써 사후적인 비로소 접근 가능한 비실체적 실존Existenz이다.

이처럼 벤야민의 실재 개념은 본질과 현상의 이분법에 근거하는 형이상학形而上學metaphysics, metaphysical philosophy 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비형이상학적 개념이다.

탈근대의 이론과는 반대로 벤야민의 질문은 "어떻게(상상적인)시뮬라시옹을 통해 현실을 구성할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매체로서으)이미지와 기구를 통해 실재를 되찾을 것인가.?".

이는 탈근대이론의 구성주의(Konstrucktivismus)에 반대하는 사실주의(Realismus)의 회귀라 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이미지를 통해 상실된 세계를 되찾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벤야민은 어쩌면 다음과 같이 답변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세계와 우리 자신을 유일한 하나의 이미지의 일부로 파악하는 법을 배운다면, 우리는 세계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2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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