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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강호제 박사가 말하는 북한기술사의 모든 것)

1903년 함흥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물리학을 공부했다.해방 직전 만주에서 물리학 교수를 하다가 해방되자마자 서울로 들어와 경성제국대학을 경성대학으로 바꾸는 데 앞장섰다. 그는 흩어져 있던 물리학자들을 모아 경성대학 물리학과를 정상화시킴과 동시에 경성대를 자체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미군정이 어렵게 운영되기 시작한 경성대학을 인정하지 않고 그를 비롯한 미군정에 비판적이던 교수들을 배척하기 위해 서울 시내 여러 대학들을 통합하여 ‘국립서울대학교’를 설치하겠다고 발표하자 월북하였던 것이다. 전쟁 시기 제자들을 대거 이끌고 월북했던 리승기처럼 도상록도 자신을 따르는 후배, 제자들과 함께 월북하여 조선 물리학계의 중심축을 북으로 옮겨버렸다. 

월북 직후 도상록은 교육사업에 전념하였다. 1946년부터 시작된 유학생 파견사업에 관여하기 시작하였고 1946년 9월에 개교한 김일성종합대학의 물리수학부 부장, 연구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력학], [량자력학], [원자에네르기와 그의 평화적 리용], [원자핵에 관한 보충 자료] 등 교재를 직접 쓰거나 번역하는 일을 많이 하였다. 1952년에는 자신의 일생일대의 꿈이었던 ‘과학기술 연구소’ 설립을 위한 실무를 담당하여 전국 과학자대회 개최와 과학원 설립을 직접 추진하였다. 과학원 설립 당시 도상록은 물리학 분야의 유일한 ‘원사’(학자에게 부여하는 최고의 칭호로서 그 아래로 ‘후보원사’ 칭호가 있다.)가 되었던 것으로 보아 그는 북 물리학계의 실질적인 대부였다.  

도상록의 물리학 세부전공은 “헬륨수소분자이온에 대한 양자역학적 취급”이라는 논문제목처럼 당시로서는 최신 이론인 양자역학과 관련된 것이었다. 이는 핵물리학과 가까운 것이라 1950년대 중반 이후부터 시작된 북의 핵물리학 연구는 도상록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55년 말 과학원 조직 재편과정에서 물리수학연구소는 ‘핵물리연구실’을 설치하였는데 이곳에 바로 북 물리학 연구의 시작점이었다. 1959년에는 소련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과학원 핵물리연구실에 ‘연구용 원자로’와 ‘동위원소 실험실’, ‘베타트론(입자가속기)’을 설치하기로 북 지도부는 결정하였다. 이런 결정을 책임지고 추진한 사람이 바로 도상록이었다. 당시 제작된 입자가속기는 지금도 김일성종합대학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1960년대 초까지 북에서 제대로 활동한 실력 있는 과학자는 대부분 월북 과학자였는데 당시 도상록을 도와 북 물리학계를 이끌었던 사람은 한인석, 정근, 전평수, 려철기 등이었다. 

북이 핵관련 이슈를 만들 때마다 북 핵물리 연구의 시작점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나오고 있는데, 대부분 북 과학기술의 역사에 대한 불명확한 지식으로 인해 생긴 오해이었다. 1955년 과학원 물리수학연구소에 ‘핵물리연구실’이 설치된 것이 북 핵물리학 연구의 시작이었고 1956년 3월, 1959년 9월 소련과 맺은 원자력 관련 협정이 소련 지원의 근거였다. 하지만 당시까지 원자력 협정 내용은 ‘평화적 이용’에 관한 것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1952년, 혹은 1955년에 설립되었다고 오해받고 있는 ‘원자력연구소’는 1962년 1월에 핵물리연구실이 물리수학연구소에서 독립한 것이었다. 추정컨대, 무기를 위한 원자력 연구는 1960년대 후반, 7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1965년 이후 국제정세의 변화와 국내 정치 환경의 변화, 그리고 북 과학기술계 내부의 변화 등이 중첩된 결과였다. 문제는 이 당시부터 국방과학과 관련한 내용은 일반 과학기술 활동과 철저히 분리되었기 때문에 당시 상황에 대한 자료를 확보하기 어려워 연구를 구체적으로 진행하기 어렵다. 하지만 북 물리학계, 핵물리학 연구의 대부 도상록이 1973년에 김일성 훈장을 받고 1986년에는 인민과학자 칭호를 받았다는 것으로 보아 당시 도상록이 하던 일, 즉 핵물리 연구와 관련하여 특별한 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90년 사후 애국렬사 칭호를 받아 애국렬사릉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