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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경남계레하나

리승기 박사는 미국 듀폰사에서 개발해 전 세계적으로 히트시킨 합성섬유 나일론에 버금가는 ‘비날론’을 발명한 사람이다. 비날론의 발명과 이를 공업화하는 데 공헌한 대가로 그는 1959년 처음 제정된 ‘인민상’의 과학자 부문 첫 수상자가 되었고 ‘로력영웅’ 칭호도 받았으며 이후 김일성상과 김일성훈장까지 받았다.(리승기 박사와 함께 제1회 인민상을 받은 기술부문 수상자가 7월호에 소개했던 주종명이다.) 

석유를 주원료로 하는 나일론과 달리, 비날론은 석탄과 석회석을 주원료로 삼는 것이다. 원료, 연료, 기술 등의 자립을 강조하는 북의 입장에서 비날론 공업화의 성공은 자신들의 정책이 정당할 뿐만 아니라 탁월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이런 이유로 리승기에 대한 북의 대우는 매우 극진했다. 

사실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고 생산량도 많은 원료, 연료를 가지고 자국민이 개발한 이론에 따라 자체적인 힘으로 대규모 생산시설(1961년 5월에 완공한 비날론 공장은 연간 2만 톤 수준으로 세계 최대 규모였다)을 만들어낸 것보다 자립경제노선, 나아가 주체사상을 지지해주는 구체적인 사례는 찾기 힘들다. 게다가 리승기의 행적 속에 북 과학기술 정책의 핵심이 모두 녹아 있으므로 그가 대중들에게 대표적인 과학자로 알려질 수밖에 없었다. 

조선 화학공업 분야의 최고 수재 

해방 직후 북에는 고급 과학기술자들이 거의 없었다. 일제의 탄압에 의해 조선인으로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이 거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 소수의 대학 졸업자들도 대부분 이남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래서 북 지도부는 자체적으로 과학기술자를 길러내는 장기적인 대책을 마련함과 동시에, 남에 있던 고급 과학기술자들을 월북시켜 활용하려는 특별 계획을 세웠다. 이때 월북한 과학기술자들은 전쟁 이후 북 과학기술계를 이끌어 가는 핵심인력이 되었다. 1939년 당시 ‘합성섬유 1호’로 불렸던 비날론을 발명한 성과로 일본 교토제국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리승기는 조선인 중에서 화학공업 분야의 최고 수재였다.
해방 직후 일본에서 귀국한 그는 경성대학 이공학부 교수로 취임한 뒤 서울대학교 공대학장까지 역임할 정도로 과학기술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는 북에서 은밀히 추진했던 월북유도사업의 첫 번째 대상자였다. 하지만 리승기는 몇 차례에 걸친 북의 요청을 거절하다가 전쟁이 터진 직후에 가서야 월북을 결심했다. 북의 끈질긴 구애와 지원약속도 있었지만 남측 당국과 국립서울대학교 설립과 관련해 갈등이 심했던 이유도 있었다. 

당시 리승기는 혼자 월북하지 않고 함께 연구하던 제자들과 함께 월북했다. 즉 ‘리승기 개인’의 월북이 아니라 ‘리승기 세력’의 월북인 셈이다. 리승기의 제자들 역시 모두 뛰어난 과학기술자였으므로 그들을 이끌던 리승기가 북 과학기술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전쟁이 중단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북의 경제와 공업이 급격히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과학기술자들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정책에 힘입은 바 컸다. 당시 북 지도부는 출신성분이나 과거 행적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었던 과학기술자들을 포용하기 위해 ‘인텔리 정책’이라는 특별한 정책 논리까지 개발했다. 

김일성 수상은 리승기 같이 뛰어난 사람도 일본 대학에서 자리 잡기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일제 말기에는 민족차별 정책 때문에 투옥되기도 했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과학기술자들을 옹호하는 발언을 자주 했다. 적어도 과학기술자들에 대해서는 과거의 행적이나 출신성분보다 현재의 능력과 의지를 더 중요하게 평가하라고 한 것이다. 

전쟁 중에 월북한 리승기는 김일성종합대학이 피난 가 있던 평안북도 청수 지역에 자리 잡았는데 그곳에는 그를 위한 비날론 연구실이 따로 꾸려져 있었다. 공업화 연구가 진척됨에 따라 중간시험공장을 건설할 때에도 아낌없는 지원을 받았다. 특히 1958년에는 비날론 공장을 세계 최대 규모로 건설하겠다는 결정이 내려졌고 비날론 공장 건설에 우선적인 지원이 보장되었다. 


‘인탤리 정책’으로 과학기술자 적극 포용

북 과학기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현장성이 강하다는 것이다. 생산현장을 중심으로 연구활동이 진행되고 생산현장의 상황, 즉 설비 수준이나 연료, 원료 수급 상황, 작업인력들의 수준 등에 따라 연구활동이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1958년 1월부터 시작된 과학원의 ‘현지연구사업’ 추진 이후 형성되었다. 모든 것이 부족한 상황에서 과학연구활동과 기술지원활동을 동시에 할 수 없게 되자 과학기술자들을 생산현장에 투입하여 연구와 기술지원을 동시에 수행하라는 정책이었다. 

리승기는 비날론 공장 건설이 한창이던 1960년에 공장건설 부지와 연구소가 떨어져 있어서 효율적이지 못하다고 하면서 비날론 공장이 건설되는 함흥 지역으로 관련 연구소를 모두 모아줄 것을 김일성 주석에게 건의했다. 이때 설립된 것이 과학원의 첫 번째 분원인 함흥분원이다. 이곳에는 과학원의 화학연구소, 중공업위원회의 화학공업연구소 등 화학공업 관련 연구소와 비날론 공장과 같은 생산시설과 흥남공업대학과 같은 교육기관이 함께 모여 있었다. 한마디로 거대한 현지연구기지 형태로 함흥분원을 건설한 것이었다. 물론 분원장은 리승기가 맡았다. 리승기 박사는 또한 플루토늄 추출 기술을 개발하여 북한의 핵개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리승기는 91세 되던 1996년 2월에 사망하였다.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고 그의 묘지는 평양 신미리의 애국열사릉에 마련되었다.